-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의원이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문자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는 그 순간,
전화기 신호음이 들려오고 '네' 하고 받을 때 상대편 호흡의 높낮이를 느끼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직감한다. 지금 의원의 기분이 어떠한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를.
맞을 경우도 있고 전혀 의외의 상황도 있지만 아무튼 습관적으로 감각이 작동한다.
매사 긴장하게 되는 이유중 하나였다.
미리 사전에 어떤 얘기를 들을지를 예상하면 감정이 생각보다 빨리 수습이 된다는 점에서
늘 예측하려 했다. 답변을 준비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 했다.
상대의 마음을 상황에 미루어 알아내는 능력, 즉 '눈치 파악을 못한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 했던 내 노력은 무기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었고 나름의 생존 방법이었다.
그렇게 이십년을 지내다 보니 표현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났던 것 같다. 후배들이 눈치 없이 행동하는 것이 거슬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언론에 의도와는 다른 기사가 보도돼 속상해하는 상황에서도 농담이나 하는 후배들은 바로 질타했고, 스스로도 한계라 여겨 짜증난 의원 면전에다가 비판이라며 흠을 늘어놓는 친구들은 회의가 끝나면 따로 불러 잔소리를 했다.
왜 그랬을까.
실은 나도 눈치만 있지 그런 상황을 미리 방지하는데에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면서도 마치 눈치가 모든 일의 해법인 것 마냥 굴었다.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에 알았더라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후배와 동료를 대했을 거다.
갓난아기는 태어나 72시간 안에 다른 사람의 표정을 정확하게 따라할 수 있다고 한다.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의 눈빛이나 표정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소위 '눈치'가 발달한다.
이는 자기보호 기제인 듯 하다.
성인이 되면서 따라하는 모방이나 눈치는 줄어들고 공감과 배려가 발달한다고 한다.
눈치는 완벽한 것이 아니기도 하고, 언어능력과 이성이 함께 발달하며
단순히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떠했을까.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내기에만 급급했지 이해하려고 했을까.
의도와는 다른 기사로 속상했던 상황에서 농담을 던진 후배는 나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계를 느낀 의원에게 비판을 하고자 했던 동료는 정말 한계라고 규정짓고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직언을 했던 것은 아닐까.
왜 난 그때 그 질문을 하지 않고 바로 질책했을까. 생각해보면 참 부족함이 많았다.
나는 소극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눈치를 통해 파악한 상대방의 현상태를 보다 능동적인 방식인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적극적인 방식은 많이 취하지를 않았다.
혹시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꺼낼까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을지.
스스로의 생각이나 감정을 자제하듯, 상대도 그러해주기를 바랬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 일단 알아도 모른척 넘어가고 눈치껏 행동하라는 신호를 줬던 거다.
그게 효율적이고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줄이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옳다고 확신했다.
이제 나이 오십을 넘어서면서 돌이켜보니, 내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들여다 보니,
또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며 원점에 서 보니,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남이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거다.
천가지 만가지 상황에 그보다 더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스칠 수 있으며, 그걸 느끼고 대화를 통해 확인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려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 말이다.
지레 넘겨짚고 이랬다라고 규정하지 말고,
묻고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대처하는 것, 그것이 잘 나이들어가는 길이다.
눈치를 넘어 공감하고 배려하려고 하자.
책임지는 일이 두렵고 내게 주어진 일만 하겠다는 친구들을 한심하게 여길 게 아니라,
그 친구가 가진 현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일단 모든 출발은 공감에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