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학습자를 응원하며

그래도 너는 소중해!

by 딱좋은나

가만히 뒤 돌아보면, 내가 중학교 시절 그렇게 공부 안하고 까불고 놀러 다닐 때.

학습량에 비해 성적이 잘 나왔던 것은 친구들이 내 아래를 든든하게 받쳐주어서였다.


재학 중이던 사립 중학교의 이사장의 지시로 이면지 재활용을 적극 권장하던 때였다.

교무실에서 나온 이면지에는 가끔 학생들이 몰라도 되는 내용들도 섞여있곤 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카더라 하는 소문 속에 그 당시 학교에서 행했던 지능검사에서

내가 교내에서 손 꼽히게 높은 스코어를 얻었다 했다.

그리고 나의 든든한 뒷배인 내 친구들은 모두 두 자리 수였다.


걸핏하면 친구들은 내게 '학교에선 놀고 집에 가서 밤새 공부한다'며 의심을 했다.

친구 셋의 평균점수를 모두 합해도 내 평균을 따라 오지 못했던 이유를 친구들은 이 카더라 소문에 바로 납득했다.


비록 나는 지능 검사 결과가 나온 그 이면지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평균보다 조금 높은 지능지수보다 호박씨 의심을 벗은 것이 더 좋았다.

내가 앞뒤 다른, 호박씨나 까는 아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준 것이기에 정말 고마울 정도로 반가운 카더라였다.




그 뒤부터 나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우스개소리로 '아이큐 두 자리' 라며 친구들을 놀리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아이큐 두 자리의 그들은 지극히 보통 평범하였다.

다만 중학생이 되기 전의 나만큼 책을 많이 읽지 않았고, 나만큼 백과사전이랑 친하지 않았었던 것일뿐.


확신하건데, 중학교 입학 전에 내가 읽고 깨치고 안 것들은 딱 중학수준까지만 유효했던 것 같다.

고등 이후에 떨어진 성적을 다시 올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공부는 죽어라 하지 않으면서 나는 내 아이큐가 떨어져서 성적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진짜로 떨어진 것은 나의 노력과 독서량과 문제 풀이 갯수일텐데 말이다.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고 생사만 아는 나의 한 때 뒷배 아이큐 두자리 친구들은 보통 평범하게 살고 있다.

아이큐 세자리라 뻐기던 나나 아이큐 두자리인 내 친구들이나

별 차이 없이 그냥 우리는 모두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



출처 : 이지선의 공존의 지혜 중에서 (이지선,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아이큐 두 자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늘은 경계선 지능. 느린 학습자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사교육 일을 하고 있는 나는 3년째 느린 학습자를 가르치고 있는 학습 도우미이다.


교습소를 거쳐 공부방 선생님이란 직업을 갖게 된 후,

'아, 어쩌면 이렇게까지 풀어서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지?'

싶을 정도로 지능지수에 대한 의심을 한 아이는 있었지만,

실제로 [경계선 지능]이라고 미리 노티스를 받고 입회를 시킨 아이는 이 아이가 처음이었다.


이 아이는 내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교습소에서 공부방으로 넘어온 시기에 받은 첫 학생이다.


시끌벅적한 마트에서 입회 문의차 걸려온 아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책임감 반, 처음 만나게 되는 경계선 지능이란 호기심 반에 이끌려

나는 운명처럼 이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잘 해볼거란 의욕에 넘쳐

마치 내가 헬렌켈러를 가르친 설리번 선생님이라도 될 줄 알았었다.

설리번 선생님만큼 유능하지도 지혜롭지도 심지어 자애롭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이 아이는 비록 경계선 지능일지라도

차고 넘치는 많은 이유들로 반드시 보통 평범하게 살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째, 학부모님께서 아이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직시하고 계신다.

과하지 않은 기대로 아이를 절대 기 죽이지 않고 사소한 성취도 칭찬하고 기뻐해주신다.

이 학부모님께서 화를 내시는 경우는 정말 예의 같은 기본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한한다.

학습 때문에 답답해 하실지언정 화를 내지는 않으신다.

숙제를 가져간 날에도 어머니 아버지께서 설명을 해주시려는 흔적들을 보면 그 열심이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숙제를 절대로 봐주지 마십사 부탁드렸다.

혼자서 푸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늘 누군가가 대신 풀어줄 수 없지 않겠나,

아이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도와주지 마시고 틀리더라도 두라고 부탁드렸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아이의 실력은 더디지만 단단히 쌓이고 있댜.


둘째, 이 아이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든든한 형제가 있다.

이 아이도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알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잊고 산다.

이 아이는 부족한 자신을 모두 넉넉히 덮어줄 정도로 똑똑하고 다부진 형제 덕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보다 제 형제에 대한 자랑을 즐겨한다.

그 자랑은 똑똑한 사람이 제 편이라는 큰 자긍심이 된다.

자신의 형제만 곁에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도 똑똑한냥 굴 수 있다.

무조건적인 이해를 받을 수 있고, 자긍심이 되는 존재 덕에 이 아이는

언제 어디서라도 절대 기죽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이 아이는 비록 느리지만 학습을 다양하고 꾸준하게 하고 있다.

경계선 지능을 위한 센터 교육을 비롯하여 공교육도 사교육도 다양하게 접하고 있다.

학부모님께서 열성적으로 서포트를 해주시며 아이가 가진 잠재되었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신다.

엄마 아빠의 뜻으로만 움직이는 스케줄이 힘들 법도 한데

이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인내심 있게 자신의 스케줄을 아주 잘 소화하고 있다.

이러한 꾸준함과 다양함이라면 [어제를 잊은 오늘, 오늘을 잊을 내일]을 반복한다해도

어디에 내놔도 기본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넷째, 이 아이의 성격은 매우 밝고 긍정적이다.

내 앞에서 이 아이는 가끔은 눈물을 뺀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성격이 아니다.

아이가 힘들어하면 곁에서 문제를 읽어주고 답을 찾는 과정을 함께 찾아주지만

절대로 답을 알려주거나 식을 불러주거나 하지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는 문제 풀이에 눈물이 찔끔 날만큼 서럽고 힘들어도

이 아이는 장난기 많은 내가 진지하게 나오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를 한다.

눈물 흘리고 나니까 비워져서 다시 채울 수 있어요!

울고 나니까 똑똑해진 것 같아요! 하면서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한다.


지켜보는 나도 이리 답답하고 힘겨운데, 용을 쓰고 악을 쓰는 자신은 얼마나 힘이 들까.

답답하고 짜증나고 어렵고 힘든 시간을 소중히 견뎌주는 이 아이를 보며

되려 나는 나를 반성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와 굴하지 않는 정신을 다시금 배운다.


마지막으로 이 아이는 타고난 운이 매우 좋다.

나는 이 아이가 경계선 지능이란 핸디캡과 함께 천운이라 할 정도로 억세게 좋은 운을 받았다고 본다.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주는 가족과 형제가 있다는 것이 그러하고,

조금 눈치 없어 보이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인복이 그러하다.

또 사소한 게임을 하더라도 아이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늘 함께 하는 것처럼 아이는 룰을 몰라도 이기고 주사위를 던져도 늘 필요한 것이 나온다.

이 아이의 인생을 통틀어 적재 적소에 배치된 운들이 계속해서 함께 한다는 느낌이 든다.




느린 학습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한 남의 집 자식.

나는 느린 학습자를 응원한다.


어제 했던 걸 오늘 잊고.

오늘 한 걸 내일 잊어도 괜찮다.


느린 학습자는 느릴 뿐 학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더 노력을 해야할 뿐이다.

한 번으로 안되면 두번, 다섯 번이 안되면 여섯번, 열번이 안되면 스무번을 해서라도 익히면 된다.

다행히 지금까지 이 아이는 성긴 간격들을 꾸준함으로 잘 메워가고 있다.


내가 볼 때 느린 학습자라지만 이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똑같다.

단지 느리게 익히고 더디게 배울 뿐, 하는 짓도 행동도 또래 친구들과 모든 것이 똑같다.

같은 이야기에 웃고, 밝은 성격 탓에 남들보다 더 잘 웃는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내게 와 일러주며 엉엉 울기도 하고,

화가 나거나 고집을 피울 땐 엄마처럼 편하게 내 앞에서 틱틱 거리기도 한다.

선을 넘어선 자신의 행동을 엄하게 다스리는 나를 원망스럽게 보며 서럽게 우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학습이 끝난 후 꼭 당부의 말을 전하는 시간을 가진다.


"울려서 미안해. 하지만 선생님이 너 싫어서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꼭 해야 하는 건데 안한다고 고집 피우면,

선생님도 해야된다고 너 시켜야만 한다고 고집 피우는 수 밖에 없어.

오늘은 울었으니까 내일은 울지말고 웃으면서 더 열심히 하자!"


당부에 더해 아이를 위로도 하고 엄할 수 밖에 없던 나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도 한다.


고개를 잘 끄덕이다가도 가끔은 내 말에 더 서러워져

나에게 안겨 엉엉 우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는데, 그럴 때 마다 내 마음이 참 아프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내 방식이 옳다고 강요한 건 아닐까.

혹시 내가 감정적으로 대한 것은 없었나,

고집 피우는 아이처럼 똑같이 나도 유치하게 굴지 않았나.

차라리 조금 도와주며 기분 좋게 학습을 끝냈을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많이 한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울려가며 가르쳐야 하나

이 아이를 가르치기에 내 능력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같은 회의감도 자괴감도 든다.



그럴 때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의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면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선생님 마음은 아이도 알고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선생님 덕에 여기까지 따라 온걸요.

처음엔 하나부터 열까지도 제대로 못세었잖아요. 기억하시죠?

그때에 비하면 얼마나 많이 늘었어요. 이 정도만해도 저는 기적 같아요."

라며 되려 나를 위로해주고 위안시켜주신다.


노력은 아이가 했는데 칭찬은 내가 듣는게 무안하지만

어쨌거나 어머니의 말씀에 무겁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러면 나는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해서 더 큰 책임감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렇게 어떤 날은 밀고 때로는 당기며 이 아이와 벌써 3년을 함께 해왔다.


가끔 내게로 오면서 "다녀왔습니다!" 하고 우렁차게 인사하는 아이를 보며

이젠 내 자식만큼 정이 들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정과 책임감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이 아이가 기억하기 쉬운 방법이 무얼지 고민한다.




내가 운영하는 공부방에서는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핑계로 개인마다 독서실 책상을 사용한다.

그 작은 책상 한 칸에서 아이들은 학습에 집중해 스스로 자신의 몫을 해나간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의 곁에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한 조언을 하고 코칭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경계선 지능인 이 아이만큼은 유일하게 내 앞에서 떠나지 않고 앉아 공부한다.

그래서 가끔 다른 아이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1호 학생이란 특권을 부여한다.

1호는 바꿀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각인이기에 아이들은 바로 수긍한다.

이제 다른 아이들도 이 아이를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 못해서 자꾸 도와줘야 하는 아이" 나

"공부를 좀 못하는 아이" 정도로 생각하고 더 이상 불만을 비치지 않는다.


우리 공부방에서 이 아이가 느린 학습자라는 사실은 오로지 나와 이 아이의 형제만 안다.

그 누구도 절대로 티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양해를 구하고 온 어머니께서 말씀해준 사정을 모두 알아 이 아이를 편견 없이 볼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말과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시선은 어른들의 것보다 더 날 것이고 또 자유분방하다.

확대를 하는 것도 축소를 하는 것도 색안경의 색을 바꾸는 것도 자신들의 마음대로이다.

그래서 혹시나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어떤 말로 이 아이를

"다름"이 아닌 "틀림" 이나 "잘못"의 프레임에 가둘까 겁이 난다.


나는 적어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문제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 받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말과 행동에 더 다름이 없이 하려고 조심하고 또 노력한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나처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많았으면 좋겠다.

"다름"과 "느림"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곁에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느린 학습자]인 나의 제자를 응원한다.

이 아이가 자라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제 몫을 할 수 있다고 충분히 믿는다.

그래서 힘이 닿는 한 연이 닿는 한 함께 하며 돕고 싶다.


헬렌 켈러를 키워낸 설리번 선생님 발치도 못따라가더라도,

단 하나, 이 아이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 만큼은 가르쳐주고 싶다.


여지껏 잘해왔고 열심히 잘 하고 있는 나의 느린 하습자.

이 아이의 잘 나갈 앞날을 응원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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