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자는 이만 퇴사합니다.
허니문.
꿀달.
신혼여행은 내게 임신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인천 부평에 있는 지사로 출근을 하기로 했었고
업무로 강남으로 자주 가야 하는 미대오빠 사정을 절충해
둘 모두 지하철로 통근이 가능한 목동에 신혼집을 얻었다.
하지만 계획에 1도 없었던 임신으로 인해
나는 지사로의 출근 대신
본사인 부산에서 계속 근무하게 되었다.
임신을 알게 되자마자
솔직히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혼식 즈음 시작 했던 드라마 두편을 마지막으로
미대오빠의 일은 더이상의 진전이 없어
반백수에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 선택한 결혼이었지만,
메스껍고 어지러운 입덧을 하면서도
출근 준비를 해야 할 때면 서글퍼지곤 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머리맡에는
직접 토마토를 갈아 만든 주스가 커다란 컵 가득 있었고
계절과일을 예쁘게 깎아 비싼 접시에 담아 두고
새벽일을 나가신 엄마의 사랑이 있었다.
내 곁에서 입덧을 안타까워하고 걱정해 주는 남편은 없지만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엄마가 계심에 안도했다.
또
외가에서 크는데 짝눈이 되면 안 된다며
먹고 싶은 것은 무조건 다 먹으라며
과일이며 고기며
매일 매번 좋은 식재료만을 골라 사다주시는 아빠 덕에
뱃속부터 부족함 없이 사랑받는 아이로
키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쪼달리는 경제사정은
사정없이 현실로 나를 밀어 넣곤 했다.
내가 부산 친정에서 지내는 동안
미대오빠는 갓 결혼도 했겠다
자취방 같은 신혼집에 혼자 살다 보니
이리저리 지인들과의 만남이 밤낮없이 잦았고
배달 음식을 먹는 횟수도 많아
본인의 수입보다 지출되는 돈이 훨씬 더 많았다.
나 역시 결혼과 임신을 한 몸인데
주말까지 친정에서 보내기엔 괜히 멋쩍어
매주 서울과 부산을 오간 덕에 교통비 부담도 컸다.
결혼 전부터 우린 각자 차도 한 대씩 굴리던 터라
정비비, 주유비, 자동차세와 보험료 등
유지비도 꽤 많이 들어갔다.
내 월급만으로 서울과 부산에서의 이중살림을 해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늘 돈이 쪼달렸다.
결혼식 축의금으로 들어온 돈은
이미 자동차 할부금 상환에 모두 사용한 터라
전혀 여윳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어떤 달은
내가 가진 금의 일부를 팔아서 카드값을 메우기도 했는데
직장에 나가느라 금방에 갈 수 없는 나를 대신해
금을 팔아준 남동생은
그 금붙이들이 여자 것이란 이유로
장물을 판 의혹을 받아 경찰서에 불려 가기도 했다.
부잣집은 아니지만 넘치는 사랑 속에서
아쉬울 것 없이 살아온 나 스스로가 느끼기엔
결혼 이후 급격히 가여워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임신 중 호르몬 영향인지
출퇴근을 하는 차 안에서 걸핏하면 눈물이 나곤 했다.
사랑에 단단히 미친 용자는
이 당시에도 미대오빠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수가 없어서
적어도 남들 앞에서는
더 괜찮은 척 씩씩한 척 더 쿨하게 버텨나갔다.
그런 나와
뱃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의 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성을 쏟는 내 친정 가족들을 보면서도
미대오빠는 현실 자각을 하지 못했고
고마움이나 미안함 따위를
느끼지도 내색하지도 표현하지도 않았다.
배는 점점 불러오니
사무실과 생산현장을 오가야 하는 나의 일에서
나는 점점 배제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추진하고 있는 다음 프로젝트에는
곧 퇴사할 나는 없을 예정이라
사무 업무에도 참여할 수도 없었다.
일을 하러 왔는데 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임신 전의 나는 영업부임에도
생산 품질 개발 구매 일에도 모두 관여를 하느라
조기진급과 우수사원 표창까지 받던
능력 좋은 멀티 플레이어였다.
임신을 하여 퇴사를 앞두고 있으니
업무에서 멀어지는 게 참 당연한 건데도 시원섭섭했다.
나를 잃는 것 같았고
끝까지 버티며 월급을 축내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일, 하는 일이 없으니
더는 일이 좋아서라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를 위해
그동안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물불 가리지 않고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었나 싶은 허탈함 허무함이 들었다.
하지만 뒷방 늙은이라도 된 듯 쓸모없어진 것 같은 내 자신이
너무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났다.
이 상황을 겪게 된 것은 모두
내 남편, 미대오빠 때문인 것만 같아
온갖 짜증과 화, 히스테리는 미대오빠에게 다 갔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애당초
그릇이 큰 것인지 마음이 넓은 것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단 한 번도 내게 화내지 않고
'아이구 그랬어?'하는 말로 맞장구치고
쏟아지는 내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쏟아붓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울애기 울애기 하면서 몇 마디 던져주었는데
뜬금없고 맥락이 없는 그 말들이 어이가 없어
난 울다가 웃다가 했다.
임신 8개월이 꽉 차
드디어 나의 퇴사일이 정해졌다.
계속되는 나의 유세와 짜증을 핑계 삼긴 했지만
나와 아기를 벌어먹여 살려야 한다며
드디어
미대오빠가 직장을 잡았다.
차장으로 입사한 회사의 지침 상
겸직 불가의 이유로
여의도에 있는 회사로 출근을 함과 동시에
남편의 짧았던 첫 사업은 내 손에 폐업신고 되었다.
그렇게 임신 8개월
우리가 결혼한지 6개월이 지나서야 우리는
주말부부가 아닌
한지붕 아래에서 같이 먹고자고싸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용자는 웃으며 퇴사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