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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Nov 08. 2023

오빠 오늘 무슨 날이게?

전남편과의 기념일

결혼 기념일은 봄이지만, 우리는 부는 바람에 코가 시큰할 때인 11월에 처음 만났다.

비록 작년에는 너무 정신없이 살면서 깜빡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해마다 결혼기념일보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더 의미있게 여기며 챙겨왔다.


"오빠 오늘 무슨 날이게?"


"오늘이 몇 일인데?"


"11월 n일"


"어..... 결혼기념일도 아니고 니 생일도 아니고. 우리 처음 만난 날?"


세 번만에 나왔다.


기억이 가물해질법도 한 결혼 1n년차, 이혼 3년차인 나의 동거인이자 전남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오오... 기억하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대단한데!"


모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알아주는 게 어디냐며 나는 그를 추켜세웠다.

-참고로 말하자면 만난지 100일 된 우리의 연애시절.

나는 나의 휴대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눈물을 흘렸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 정도 밖에 안되나 싶어 분하고 억울하고 짜증나서.

그는 단축키 1번에 저장된 나를 1번을 꾸욱 누르는 것으로 대신하여 살던 사람이라

단지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한다는 사실에 우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후부터 나는 주입식 그리고 암기식으로 그를 교육시켰다.


내생일은 몇월 몇일, 우리 처음 만난 날은 몇월 몇일, 내 전화번호는 몇 번.

수도 없이 묻고 또 물어서 그의 입에서 기계적으로 대답이 나올 때까지!





결혼하고 이혼까지 한 요즘은 도통 묻질 않았으니 세 번 만에 나온 것만해도 대단하다.

적어도 그가 헤아린 숫자에서 아이들이나 양가 부모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에 관한 것들만 나왔으니까.


"저녁에 둘이 데이트라도 할까?"


바쁜 날, 돈도 없어 죽을 맛인 요즘 경제상황에 당치도 않은 말이지만 

일단 그가 그렇게라도 물어봐주는 게 좋았다.


"뭐할 건데? 뭐 하려고? 뭐 계획있어?"


그가 무엇을 하자 해도 돈줄을 쥐고 있는 내가 응할리는 없지만 

혼자만 들뜬 게 아니라 무어라도 같이 할 맘이 있는 그의 대답에 신이 나 

일단 기분이라도 내보려고 되물었다.


"둘이 밥 먹고 술이나 한 잔 하지 뭐."


밥 먹고 술 한잔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누구나의 데이트 코스인듯 하지만. 

어쩐지 김이 팍하고 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또 좀 서운하다.

거창한 무언가는 없겠지만 둘이서 기념할만한 마땅한 건수도 없지만..

오늘이 아니어도 언제든 가능한 그의 대답에  내 맘이 좀 그랬다.


차라리 오늘을 기념하게 지금 당장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두자고 했더라면 조금 덜 섭섭했을까.


"산책이나 해. 그저 돈 쓸 궁리하고 있어!"


뾰족해진 눈으로 내가 대꾸하자 그의 큰 눈도 덩달아 뾰족해진다


"뭘 좀 하자고 해도 그놈의 돈돈돈.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지.

오늘 무슨 날이라며!"


늘 여유로운 그는 돈돈 거리는 내가 불만인듯 했다.

둘에서 다섯이 되었다가 비록 우리 둘은 법적으로 찢어지기는 했지만.

나는 언젠가는 하고 말 그와의 재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동거도 연애라며, 재혼까지의 과정을 연애로 생각하고 있다.


뭔가 특별한 하루를 바라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커플링이 하고 싶다는 말이 목전까지 차오르지만 차마 뱉어낼 수 없다.

재혼하는 날 꼭! 해야지 하고 맘 먹고 있기에.


"무튼 오늘. 우리 처음 만난 날이라고."


"어. 알아."


김 빠진 그의 시큰둥한 대답이 맘에 안들지만 

그래도 오늘은 적어도 우리 두사람에게 특별한 날이다.

똥을 밟았건 된장을 밟았건,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건 

일단 오늘은 우리가 시작된 날이니까.


"기분 좋게 일 하고 와. 오늘은 우리 기념일이니까."


"어!"


감흥 없어 보이던 그는 출근길에 차를 바꿔간다는 핑계로 또 기어이 나를 주차장까지 데려갔다.

차에서 별로 뺄 것도 없으면서 시간을 끌며 운전석에 앉은 그를 향해 고개를 내밀어 뽀뽀를 청했다.


"CCTV 있는데!" 라고 하면서 그는 가볍게 내 입술에 입술을 맞닿아 왔다.

남자 입술치곤 얇아서 별로인 그의 입술이지만 내게 닿은 그의 온기가 기분이 좋다.

이혼을 했더라도 재혼을 꿈꾸는 내가 그로부터 그래도 사랑은 받고 있는 것 같다.


"헤헤. 해줄거면서 튕기긴."


여상한 내 말을 듣고 그가 피식 하고 웃었다.


그냥 이렇게 그와 함께 나누는 소소함과 편안하지만 설레는 기분좋은 느낌이 

전남편에게서 여전히 나를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가 뽀뽀 두 번으로 그렇게 출근을 하고 내 앞에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나와 그의 사랑의 정표인 아이 둘을 데리고 치과에 가야하는 예약일이기도 하다.


나는 애 둘을 붙잡고 시간쓰고 돈쓰고 애를 쓰고 용을 썼다.

막내의 이 치료에만 두 달동안 40만원이 넘게 들어갔다.

둘째 예삐의 이 치료는 6n만원으로 예정되어있다.


이 와중에 기념일을 챙기긴! 말도 안돼!

애 셋 챙기느라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볼 여유가 없는데. 

잠시나마 특별한 하루를 꿈꾼 나를 카드 명세서는 현실로 곧장 끌고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기분이라도 내고 싶은 날이다.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낸 후 평소에 하지 않던 전화를 걸었다.

그가 출근한지 고작 몇 시간도 안되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응, 왜?"

여보세요도 없이 전화를 받은 그의 목소리의 다정함에 괜히 먹먹하다.

내 속마음을 숨긴 채 그냥 업무적인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누었고, 통화의 말미에 물었다.


"오늘 늦어?"


"왜?"


"오늘 무슨 날이야?"


"우리 처음 만난 날."


"일찍 와야지?"


"알았어. 일찍 갈게."


호적은 찢어졌어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가 내 곁에 있어주는 오늘 하루가 좋다.

여느 날과 똑같은 하루라도 함께 우리의 기념일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음이 좋다.


그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이리도 넘치는 나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도 넘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오늘 기분이 좋다.


"보고싶어 빨리와."


"일이 끝나야 가지."


무드라곤 없는 그의 대답으로 우리 통화는 끝이 났지만, 전화를 끊고난 여운이 길다.

집으로 일찍 오겠다던 그의 대답을 나는 또 마냥 기다린다.

장거리 연애를 하며 그를 만나는 날을 손 꼽아 기다리던 그 때 그 시절처럼.


사랑.

애정.

믿음.

신의.

예의.

그리고 우리가 함께할 미래.


그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사람이 내 곁에 전남편의 이름으로든 동거남의 이름으로든.

그가 있음이 좋다.


그는 알까, 별 것 아닌 하루도 이렇게나 설레어하며 보내고 있는 나의 이런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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