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만만세!
나도 결혼 전에는 중소기업을 다니며 직장생활을 했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9 to 6가 절대 지켜질 수 없는 제조공장의 해외영업부였다.
회사까지 가는 길은 멀기도 멀어 출근길의 막히는 도로에 끼이지 않으려면
8시 30분으로 정해진 출근시간보다 훨씬 일찍 가있어야했다.
해외 영업부이기 때문에 해외 바이어와의 연락을 위해서라면 시차도 무시되었다.
일은 내가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컴퓨터로 고스톱이나 포커를 치며 버티고 있는 부장님 눈치를 봐야했다.
우리 영업부 일은 끝이 났는데 같은 사무실을 쓰는 개발부서는 다들 바빠서
나 혼자만 퇴근을 해도 되나 말아야 하나 갈등도 했었다.
나는 장거리 연애를 했기 때문에
금요일만큼은 총알같이 튀어나가며 칼퇴근을 했다.
당당하게 칼퇴근을 하기 위해 나는 더더욱 월화수목은 오래오래 회사에 있었다.
보통 퇴근 시간은 저녁 8시로 나는 하루의 반 이상을 회사에서 있었다.
왕복 30분 거리가 밀리면 두시간도 걸리는 출퇴근 길이었기에,
차라리 회사에서 주는 저녁을 먹고 느즈막히 뚫린 도로를 달리는 것이 편하다며 위로 삼았었다.
이 죽일놈의 회사!!!! 하는 소리를 몇 번이나 하는 동안 눈치도 엉덩이 힘도 길러졌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그립지만 하고 있을 때엔 몇 번이고 그만하고 싶었던 회사생활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바로 생겨
임신 8개월을 꽉 채우며 퇴사를 함과 동시에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사업을 말아먹는게 특기이자 장기인 남편 덕에
나는 소소하게나마 계속 돈벌이를 해야 했다.
아이들이 있어 시간에 매일 수가 없어 단기적인 프리랜서직을 구했는데,
그 덕에 우리집 아이들은 돌이 지나면 무조건 어린이집을 가야했다.
대학원 다닐 때의 인연으로 시간강사 선생님의 강의 준비를 돕는 일도 했고,
네트워크 형태의 생활용품 파는 일도 시작해볼까 했었고
교육을 받고 짧은 기간이지만 학교에 외부 강사로 강의를 나가던 때도 있었다.
시간과 급여가 일정치 않은 프리랜서 일보다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아르바이트로 바꾸어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기도 했다.
쇼핑몰의 콜센터 업무를 한 적도 있었고,
물류회사의 영업직을 거쳐 영업관리직도 했었다.
골고루 일을 하긴했지만 진득하게 오래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이 엄마인 내 업무 시간이 남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10시 출근 5시 퇴근이 내게는 좋지만, 남들에겐 형평성의 문제가 되었다.
아이가 아프거나 한 날에는 집과 회사를 오가야 했기에 내 활동 반경도 제한적이었다.
셋째가 생길 때까지 배려를 많이 해주신 오너 덕에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물류회사 일은 그래도 그나마 오래 했었다.
밤도 낮도 없이 물류센터를 찾아다녀야 하는 일을 했던 물류회사의 영업관리직 시절.
네살 여섯살인 두 딸만 집에 두고 나가기도 해야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날엔 차 뒷자리에 태워 가
내가 업무를 보는 동안 아이들은 차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살려고
살아보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처절하게 일을 했었다.
"엄마는 일하러 갔고요, 아빠는 오고 있는 중이에요.
언니랑 저는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보며
집에서 엄마랑 아빠가 빨리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네살이던 둘째가 그림을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했던 말이었다.
알림장에 쓰인 그 말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독하게 버티며 일도 제법 즐길 수준이 되기도 했지만
막내가 생기며 나는 물류회사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가 셋이 된 이후 나는 밖으로 돈을 벌러 나가는 걸 포기했다.
그렇다고 집에서 놀 팔자는 못되었다.
막내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사업이 완전히 쫄딱 망해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이유로 이혼녀가 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아파트 상가에서 교습소를 시작했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배고픔을 참지 못해 차가운 정수기 물에 라면을 불려 먹는 딸들 때문에
나는 이사를 감행하며 교습소가 아닌 공부방을 시작하게 됐다.
지금도 나는 아이 셋을 핑계로 집에서 일을 한다.
공부방은 아이들이 하교한 이후, 오후 시간에 시작된다.
몇 시간만 바짝 하면 되서 비교적 오전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운이 좋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소득도 업무 시간 대비 훌륭했다.
그래서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직장생활의 애환을.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나름 편하게 돈을 벌던 내가
12월 한 달 동안 사회복지사 실습을 이유로 요양원에 출근을 하며 9to6의 생활을 하게 됐다.
첫날은 다녀오자 마자 뻗어잤다.
둘째 날은 좀 다를까 했지만 웬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 뻗었다.
익숙지 않은 일이라서 그렇겠지 하며 버티길 여러날이었지만
실습 16일차가 된 어제까지 집에만 오면 계속 뻗었다.
요양원에서 실습업무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샤워부터 한다.
늦은 저녁을 차려 아이들과 밥을 먹고나면 나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게 된다.
어떤 날은 저녁 먹고 양치할 힘도 없어 새벽에 일어나 양치를 하고 자기까지 했다.
집에서 여유롭게 실습일지를 쓸 겨를도 없고,
이사를 하고 전학을 해 적응 중인 내 아이들을 돌보기는 커녕 몇 마디 나눌 여력도 없다.
내가 체력이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님에도 자꾸만 뻗었다.
유난히 약한 추위도 한 몫하고,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하는 부담감도,
실습 업무 중에 소진해버리는 에너지도, 요양보호사들과 사회복지사 사이의 간극도.
모든 게 익숙해지지 않고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어려움이다.
9to6의 삶이 시작된 후
곰 두 마리가 어깨에 올라 탄 듯, 마냥 피곤하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우스개소리로 할머니들께 기가 다 빨려서 그런 것 같다고 하니 실습생들 모두가 동감했다.
모두들 집안일은 멈춘 상태라며 너도 그러냐 나도 그렇다고 했다.
그나마 나만 이런 게 아니란 사실이 위로가 된다.
9to6를 하는 동안 [정해진 시간에 매여 사는 워킹맘]들에게 전에 없던 존경심이 절로 생겼다.
고작 20일이면 끝나는 실습을 버티는 것도 나는 이리 힘든데!
매일을 그렇게 사는 엄마들은 도대체 어찌 버티는 걸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 같아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집안일에 회사일에 육아까지.
모든 걸 제대로 해내기란 작은 내 그릇으로는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동네에서 남편과 둘이 아이 셋을 키우며 돈을 벌고 열심히 산다
며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대단한 워킹맘들이 대한민국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9to6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들.
참말로 존경스럽다.
시간에 매여 사는 워킹맘들 모두 만만세!!!!!
나는 진심으로 당신들을 존경합니다.
실습의 막바지까지 나는 계속해서 피로에 절여있을테다.
이렇게 몇 글자 쓰는 것조차 힘들어 헤롱댈 정도로 말이다.
크리스마스가 월요일인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