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결혼하고 이혼도 했다.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1
나는 부모 형제 친구를 비롯해 내가 살아온 발자취, 또 내가 살아갈 (보장된) 미래까지 모두 버리고 남자 하나만을 이유로 부산에서 서울로 시집이란 걸 왔다. 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선택할만큼 나는 그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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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의 고향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마치 미리 정해진 운명 같기만 했던 만남이었고, 시작과 동시에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과속해서 사랑을 했다. 서울과 부산 먼 거리만큼 달라도 정말 너무 다른 우리였음에도 우리는 그 차이를 곱씹을 새도 없이 서로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사랑이 아니라 오기다, 결혼까지 하기엔 별로다 는 주위의 만류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2년 반이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장거리 연애를 했고, 시간이 지나는 만큼 우리의 사랑은 켜켜이 그리고 단단히 쌓였다.
사랑에 푹 빠져있던 그때의 나는 참 참을성이 없던 성격 급한 여자였고, 그와 나의 물리적 거리를 힘들어했다. 하지만 늘 여유롭고 유순한 그는 우리의 가까운 심리적 거리로 믿음을 주었고 나를 위로했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것 같은, 거칠 것 없던 내 사랑은 그 어떤 장애물로도 막을 수 없고, 영원히 멈출 수도 없는 폭주 기관차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나 열렬히 나는 나의 남자친구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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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이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질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사람과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나이는 스물여섯이었고, 아직 직장도 잡지 못한 채 학교에 남아있었다. 겉으로 보나 속으로 보나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기엔 이르다 싶던 때였다
하지만 나는 연애 2년차에 연애를 포기했다. 보고싶을 때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을 때 곁에 없는 장거리 연애에 기권을 했다. 그렇게 나는 일방적으로 남자친구와 내 부모님께 결혼을 선언했고, 상견례를 했다. 일단 미루고 보려는 그의 집안 사정을 최대한 받아들여 반년간 천천히 결혼준비를 했다.
그렇게 스물아홉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손을 잡고 위풍당당히 버진로드를 걸었다. 지금도 결혼식 사진을 보면 시어머니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지만, 나는 잇몸이 만개할 정도로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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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여러 번 해봤어도 결혼은 처음이었다. 내 나이 스물아홉이라도 주위에 결혼한 친구는 거의 없었고 몇 안되는 기혼녀들은 겉으로 보기엔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내 또래의 결혼 생활의 힘든 점에 대해서는 보고 듣는 것이 없었다.
다만 12시가 땡땡땡 되어야만 제사를 지낼 정도로 고지식한 종갓집의 맏딸로 자라는 동안 보고 들은 게 있었기에, 결혼만 하면 무조건 행복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따위는 당초부터 가지지 않았다. 신혼이 핑크빛일 거라 기대하지 않은 것은 내 결혼이 준비에서부터 팔 다리 하나 씩을 떼내는 것 같은 핸디캡 장착의 연속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불 보듯 뻔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나의 부모 형제 친구가 모두 이 결혼을 나를 여러 번 말렸다. 그러나 나는 귀머거리에 장님이 되어버린 후라 정말 사랑 하나로 결혼을 밀어붙였다. 그러면서도 내 알량한 자존심은 매 순간 각오를 다졌다.
"진짜 보란듯이 잘 살아볼 거야!"
비록 매 순간 그 다짐을 흔들만큼의 슬픔 울화 시련 고비 책임 의무 따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렇게나 나는 전투적으로 사랑했고 전쟁의 승리처럼 마침내 결혼을 쟁취했다.
스물 아홉, 나는 사랑하는 남편만 있다면 그저 적당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보통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할 줄로만 알았다. 상상에서도 꿈속에서도 이렇게 이혼녀가 되리라곤 단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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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와 잘 맞는, 아니 나에게 잘 맞춰주는 그와 함께 10년간 꽤 많이 행복했고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꾸려왔다. 정말 최선을 다해 우리는 사랑하고 인내하며 가정을 꾸려왔다. 그 덕에 나름 잉꼬부부, 바퀴벌레 한쌍, 찐사랑, 사랑꾼 등의 소리를 들으며 자타공인 꽤 잘 사는 부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삶은 럭비공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었고, 나는 이혼녀가 되었다.
철썩같이 서로에게 운명이라 믿었던 우리가 딱 10년을 살고 협의 이혼이란 걸 했다.
우리가 부부로 사는 동안 내 나이는 스물아홉에서 서른아홉이 되었다. 그 기간동안 우리는 둘에서 우리의 피와 살이 섞인 아이들을 셋 낳았다. 딸이 둘에 아들도 있어 남들은 200점이라 하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다둥이 부모가 되었다.
행복했다. 우리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셋이라서 너무나 행복했다. 남편을 사랑하는만큼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이혼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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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끈뜨끈한 해가 높던 초여름 우리가 사는 곳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지방 법원에 가 협의 이혼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혼이 완료되기 까지 서로 이혼에 협의 한 우리 두 사람보다는 앞으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게 될 아이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을 이유로 우리는 법원에서 지정하는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몇 번에 걸친 부부상담도 받았다. 상담을 받는 동안 별 말이 없던 그와는 달리 나는 지난 10년간 꽤 많은 것을 내가 참아왔고 인내했고 견뎌왔음을 알았다. 상담사와 대화를 하는 내내 서러움에 복받쳐 우는 나를 의아한 얼굴로 보던 남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다 뱉어내고 울고나면 속이 시원해져야 하는데, 상담실 문을 나와 그의 얼굴을 마주보면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상담 시간 동안 토해낸 나의 말과 감정이 그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울고 웃으며 이혼을 위한 3개월의 짧지 않은 숙려기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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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의 모든 준비 과정을 마치고, 법원에서 이혼을 해도 된다는 결정문을 받았다. 결정문을 받고 난 후 우리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부터 했다.
결정문을 서류 모음 안에 꽁꽁 숨겨둔 채 다섯식구 모두 함께 이사한 집으로 전입신고를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 10년 만에 남편의 처가 아닌 세대주가 되었다. 이혼남이 될 남편은 곧 이 집을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핑계로 시간을 미루며 새로 이사한 집에서 또 백일 남짓을 함께 살았다. 경기도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변화된 환경에 아이들이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핑계를 대었지만, 솔직히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내 진심은 그랬다.
아이들이 안정을 찾는동안 나와 남편의 관계 변화, 그것에 대해서 우리 부부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보다 더 남편이 이혼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 그 역시 어쩔 수 없기에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이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 역시 어쩔 수없다는걸 알면서도 감정이 앞서 이혼하기 싫다, 이혼녀가 되기 싫다며 징징 거리곤 했다. 그렇게 이혼의 마무리인 이혼 신고를 기한의 끝까지 미룰 정도로 전 남편과 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정말 이 방법이 최선인지, 진짜 이 방법 밖에 없는지.
고심 끝에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기로 했다. 백 번 천 번을 더 고민한다고 해도 이혼 이외의 해결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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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혼 신고의 날.
평소와 똑같이 아이 셋과 함께 버무려져 우리는 한 방에서 잠을 자고 같은 시간에 깼다. 한 식탁에서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엄마아빠 잠시 마트 다녀올게 너희들이 좋아하는 과자 사 올게'하는 약속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집을 나섰다.
코 끝이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방학 중 한 날이었다. 나와 남편은 숨겨두었던 법원 결정문을 조심스레 꺼내들고 재빨리 가방에 넣은 후 주민센터로 갔다.
이혼 신고를 하러 왔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달았기 때문일까. 이혼신고를 하러 왔다며 법원 결정문을 내밀자 당황과 민망으로 얼룩진 표정의 직원이 급히 민원 창구의 안쪽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정문을 제출하고, 종이 몇 장에 사인만 한 것 같다. 그렇게 이혼 신고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소요됐고, 며칠 후 등본 상의 남편 이름 옆에는 동거인이라는 글자가 새롭게 나타났다. 이혼의 준비 과정은 그리고 길고 지루하더니, 우리의 이혼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전남편이 된 건, 내 나이가 딱 마흔 살이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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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2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지난 10년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티끌만큼의 달라짐 없는 그의 마음 그대로 사랑 받고 있다.(글은 이렇게 쓰면서도 사실은 그의 마음이 변함 없다고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나의 남편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응급실에서조차 서로에게 보호자가 될 수 없는
완전한 남이다.
누군가 "왜 이혼했어?"라고 묻으면 우리는 '사랑해서' 또는 '애들은 지켜야지' 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을 들은 백 이면 백이 그런다.
"너네 그거 위장 이혼이야."
혼자여도 예쁘게 피었지만 곁에 다른 꽃이 있어 외롭지 않지? 나는 이혼녀라도 전남편이 곁에있어 외롭지 않아.
그러면 나는 단호히 대답한다.
"그냥 전남편이랑 동거 중일뿐이야. 이 사람이랑 재혼은 절대 안할 거라고!"
그런 나를 보고 전남편이 묻는다.
"진짜 재혼 안해줄 거야?
이렇게 우리의 관계는 우리는 이혼과 재혼 사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