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첫 명절
이혼과 재혼 사이의 우리 3
남편과 내가 이혼을 해야만 하는 사정에 대해 친정부모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던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들어서 늘 염려와 걱정을 하고 계셨으니 이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수긍하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담담히 나의 어쩔 수 없는 이혼을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미뤄오던 이혼 신고가 끝나고 진짜 이혼녀가 된 딸이 설날 연휴에 다니러 온다 하니 시댁은 어떻게 하고 친정을 오냐 물으셨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첫째와 둘째가 연이어 입학을 한 이후로는 멀어도 너무 멀다는 이유로 명절에도 친정부모님의 생신에도 나는 부산에 가지 않았고 용돈만 보내드렸다.
다만 내 용건이 있을 때에는 차를 타고서 든 비행기를 타고서 든 부산이든 어디든 가뿐이 다며 나온 김에 친정에 들리기나 하는, 좀 못되고 이기적인 딸이었다.
"돈 드니까 오지 마, 돈 드는데 뭐 하러 와."
다섯 식구가 움직이는데 쓰는 돈이 만만치 않다 보니 내 부모님은 명절이나 당신들의 생신에도 내게 다녀가란 소리 대신 오지 말라 하셨다. 보고싶다 한번 와라 말 한마디 못하시면서도, 나의 뜬금없는 부산행을 전할 때면 뭐가 먹고싶냐고 며칠 전부터 물으셨다. 그렇게 나의 엄마와 아빠는 나의 방문을 오매불망 기다리고만 계시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이혼 후 맞는 첫 명절인 설날의 친정행, 이혼녀가 된 딸인 나를 처음으로 거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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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에서 나고 자란데다 종갓집 맏아들인 아빠, 우리 집안에는 아직 이혼 가정이 없다. 고지식한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 역시 이혼을 죽을 죄처럼 여기시며 당신의 힘든 삶도 감내하고 사신다. 그런 내 부모님께서 딸의 이혼을 존중하고 쉽게 받아들인 것이 의외다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피치 못할 사정에 따른 위장 이혼쯤으로 생각하고 계셨기에 가능했던 수긍이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혼녀가 시댁이 어딨어? 내가 그 집엘 왜 가, 이제 안 가도 돼. 안 가."
라는 내 대답은 진심이었건만.
엄마와 아빠는 평소의 내가 그렇게 장난스레, 힘든 일도 아무것도 아닌 듯 말해왔던 것처럼 또 가벼운 장난처럼 받아들이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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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긴 어딜 안 가! 가야지 왜 안 가!"
"함부래이!!! 애들이 다 듣고 보고 배운다. 절대 농담으로라도 애들 듣는데 선 그런 말 하지 마라."
"아무리 ○서방이 잘못하고, 어른들한테 서운하고 화가 나도 네 할 도리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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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남편이 없는 이혼녀라 도리를 차릴 어른은 내 부모뿐인데 잔소리 폭격을 시작한 나의 엄마 아빠의 귀는 이미 꽉 닫혀 그 어떤 내 말도 당신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어쨌거나 나 이번 설에는 부산 간다고요."
"시댁에 안 갈 거면 친정도 오지 마라!"
수화기 저편의 아빠는 잔뜩 굳은 목소리로 무서운 한 마디를 남기시고 전화를 뚝 끊어 버리셨다.
이혼은 부부 둘만 하는게 아니라 온 집안 모두가 함께 해야하는 이별이다.
이혼은 우리 둘이 결정하고 끝낸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세 아이를 통해 그 사실을 톡톡히 배우고 상기하고 있었음에도, 양가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도 이렇게 크게 영향력을 미칠 줄은 몰랐다.
결혼이 집안과 집안 간의 결합이라면 이혼은 집안과 집안 간의 이별이었다. 흔히 만나고 헤어지듯 쉬운 이별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러하듯 어려운 이별도 있는 법이다. 결혼식, 돌잔치 외엔 서로 얼굴 마주 볼 일 없이 몸도 멀리 마음도 멀리 살던 양가였기에 두 집안의 이별이 쉽고 편할 거라 생각한 건 무지의 소치이자 내 오만이었다.
"엄마아빠는 그냥 서류만인 줄로 생각하셨는갑드라."
나중에야 엄마아빠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를 걸어온 내 남동생이 한 말이었다. 화가 나 전화를 먼저 끊으셨어도 내 부모님은 한참을 애닳아하셨다 했다. 나이보다 훨씬 더 고지식한 두 분은 딸의 이혼을 받아들이지도 외면하지도 못하고 계셨다. 내가 진심을 담아버졌기에 이제 진실이 되어버린 내 이혼은 내 부모에게도 이별을 겪게 한 것이다.
"안되믄 부산 내리 온나. 엄마아빠가 애들 같이 키워주실끼다."
혼자 아이들을 책임지게 된 나를 나보다 더 걱정하고 계시다는 내 부모님의 속마음을 대신 전하는 남동생의 목소리도 조금은 떨렸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왜 이제야 이혼의 무게가 실감이 나는 건지 따끔해진 코 끝과 목구멍을 핑계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근데 이번 설에 매형도 부산 올 거라던데?"
먹먹해진 분위기에 화제를 돌리려는 듯 나도 모르고 있는 전남편이자 동거남의 계획을 동생이 전했다. 놓지 못하고 있는 마음처럼 동생의 입에서도 여전히 그는 매형이었다.
아무런 말을 들은 게 없었기에 깜짝 놀라 전화를 끊고 사실을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전남편은 이미 시부모님께 이번 설은 처가에 다녀오겠다 말씀드렸다 했다. 그러나 아직 이혼 소식까지는 차마 전하지 못했다며 혹시라도 내가 불편한 상황에 닿을까 걱정했다.
나는 이혼을 위한 부부 상담을 받으면서 그보다 그의 부모님을 더 못견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사실이었다. 이미 속으로 몇 백번을 더 곱씹던 나는 쉽게 원인을 찾았는데 전 남편이 인정하기 까지 우리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제 부모에 대한 힐난을 쉽게 감내할 이가 누가 있을까! 시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면 목소리를 높여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 걸려온 시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전남편은 완벽히 알았다. '당신 엄마는 안그러시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그런다.'는 걸.
이제 이혼녀가 된 이상 더는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부당함과 무심함을 감내하고싶지 않았다. 싸워가면서도 당신 부모님과 내가 엮일 일은 가능한 없게 해달라고 확실히 부탁했기에 전남편이 내 눈치를 보았다.
"나한테 전화만 안오게 해 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그는 걱정 말라 했다. 이어서 그는 나의 부모님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이혼 했으니 며느리 역할 안하겠다는 네 의견은 존중할게. 우리가 이야기 해도 일흔이 넘으신 분들 이제와 바뀔리 만무하니까 안보는게 최선이지. 근데 우리가 이혼해서 네가 시댁 안 가는 건 안 가는 거고, 내가 처가에 가는 것 까진 막지 않았으면 해."
우리의 연애서부터 결혼까지 그는 나의 부모님, 특히 엄마로부터 사위 대접을 톡톡히 받아왔다. 그랬기에 이혼은 했지만 지난 10년간의 고마움과 감사함을 이혼으로 되갚아 드리고 싶지 않다 했다.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사과도 하고 싶지만 차마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는 없다 했다.
그는 나의 부모님을 뵙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번 설날에는 다 함께 친정에 가자 했다. 또, 내 부모님과 내가 허락만 한다면 앞으로도 사위 역할은 계속 하고 싶다했다. 그의 진심에 더해 남 보기를 중시하는 내 부모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최선의 배려를 나 대신 전남편이 해 준 것이다.
나에게도 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나의 전남편은 우리 다섯 식구가 예전과 똑같이 완전체의 모습으로 부산 친정에 다녀올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는 상관도 없고 어쩌면 평생을 살아도 마주칠 일도 없는, 남이 되어버린 내 부모에게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전하려 하다니. 나는 이런 그의 마음씀씀이가 참 고마웠다. 평소엔 정말 무심한듯 한데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를 잡는 법을 아는 그이다. 이런 그를 나는 도저히 아직 놓을 수가 없다.
그만큼 착한 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전 시부모님도 나와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러나 못되쳐먹은 나는 그 만큼 사려깊지 못하다. 미운정도 정이라는데 그저 미움만 앞세우며 그의 부모님과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잘 마무리 지을 생각을 안했다. 아니 못했다. 그를 보며 내가 좀 부끄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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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좋았으나 거기 까지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는 그 해 설날, 코로나로 인해 친정도 시댁도 가지 못했다. 코로나로인해 모두와 멀어졌다. 이제 우리는 그저 시간에 의지해 두 집안과 우리 아이들이 자연스레 우리의 이별을 받아들일수 있도록 조심 또 배려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그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역시 아직은 진심어린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우리는 지금 이혼과 재혼 사이에 있다.
그런 우리 관계에 if를 붙여 만약을 떠올려 본다. 우리가 언젠가 재혼을 하고 다시 부부가 된다면 하고.
그의 아내로 사는 동안 내가 시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먼저 떠오른다. 그건 나의 전 시부모님들이 나빠서 받은 상처가 아니었다. 그저 나는 그분들과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 또 그분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나와 다른 방법었을 뿐. 그 분들은 내게 당신들이 상처를 주는지도 모르셨을 테다.
그렇게 인정받지도 못하는 상처들이 10여년간 늘었다. 이혼을 하고난 이제야 겨우 절연이라는 약을 발라주었다. 아문다 하더라도 흉터가 되어 남을 상처들이, 우리의 if에 다시금 들춰지고 헤집어졌다. 거기다 더해 이혼 기간동안 그 분들이 내게 느끼셨을 섭섭함이 더해져 내게 또다른 상처를 주실지도 모르겠다.
재혼 후 시부모님을 생각하는것만으로도 살짝 몸서리 쳐지는 걸 보니, 아직은 재혼보다는 이혼에 가까운 우리 사이이고 싶다.
아이들에게 나는 모범이 되고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하는데 늘 잘 못하는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