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렇게 차림새로 고집부릴 때 보면, 우리 아들은 주는 대로 입는 아빠아들이 아니고 엄마아들이 맞는 것 같다.
나도 예전에 혼자만의 멋을 부린다고 여름에 겨울바지 입고 '철없는 아이'가 된 적이 있었다. 집밖에 나가는 순간부터 더운 날씨에 두꺼운 기모 바지는 정말 미칠 지경이더라. 집에 와서 보니 벌겋고 오돌토돌 땀띠가 허벅지를 두르고 있었다. 그 후론 두 번 다시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은 손에 쥐지도 않았다.
그래, 어디 한 번 네 발도 쫄딱 젖어보렴.
엄마로서의 걱정은 접어두고, 아들이 원하는 대로 신발을 신도록 두었다.
나는 위험하거나 민폐가 아닌 일이라면 아이들의 말을 되도록 수용해 주는 편이다.
대신,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질 수 있도록 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 것 같다면, 한 번은 먹어봐야 다음번에 다시 먹지 않는다.
엄마 말은 무조건 반대하고 보던 고집불통이었던 나도 그렇게 자랐기에, 아이들의 선택에 어지간하면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아들은 결국 장화를 신기려고 신겨두었던 발목양말을 그대로 신은 채 크록스를 신었다.
그리고 킥보드 대신 우산을 들고 집을 먼저 나서며 나를 채근한다.
오늘은 막내의 어린이집에서 시장놀이 행사를 하는 날이다.
마음은 이미 어린이집이지만 퍼붓듯 내리는 비를 뚫고 편의점으로 먼저 갔다.
지참금 현금 5천 원이 필요해 잔돈을 바꾸기 위해서다.
우리는 딸들이 좋아하는, 2+1의 이온음료를 구매했다.
통신사 할인도 받고, 현금 영수증도 야무지게 챙겼다.
평소엔 카드 결제를 주로 하지만 오랜만에 현금을 썼다.
"음료수는 엄마가 집에 가져다 둘게, 나중에 누나들이랑 같이 먹어."
어차피 어린이집에 음료수를 가지고 간다 해봤자 절대로 주지 않을 엄마임을 알기에 아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몫의 음료를 건네주었다.
시장바구니 안에 음료수 셋을 넣어서 어깨가 묵직해졌다.
편의점을 나오자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다행이다 싶은데 어린이집까지 가는 동안 물웅덩이만 골라가는 아들, 그리고 저만치 앞에 어린이집이 보인다
"양말 안 젖었어? 물 있는데 가지 말라니까."
"젖었지. 발이 차가워."
"장화 신었으면 안 젖었지. 물에 가서 찰방찰방해도 되고."
차갑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 아이를 세우고 양말을 벗겼다. 축축한 양말을 쥐니 내 고집을 부려 장화를 신길걸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아이에겐 발에 신겨진 것이 크록스든 장화든 중요하지 않다.
"엄마 빨리!"
"다 됐다! 잘 갔다 와. 보고 싶을 거야."
쏜쌀같이 어린이집으로 빨려들어가는 아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쳐보지만 대답이 없다.
엄마인 난 보고 있어도 아들인 네가 보고 싶은데.
이것저것 테이블 위에 올려진 시장놀이 재료들에 홀려 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간지 오래다.
그 모습마저도 어여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참 아들이면 무조건 좋은 아들 바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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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찍 귀가한 남편이 다행히도 아들을 데리러 가주었다.
내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아들을 데리러 가준 그가 고맙다. 내가 집에서 일을 하느라 우리 아들은 어린이집에서 가장 늦게 하원하는 아이 중 하나이다.
"엄마!"
집으로 들어서는 아들의 한껏 고조된 목소리가 울렸다.
저녁 식사 준비를 무얼 할까 하던 차에 아들은 제 몸만 한시장바구니를 질질 끌듯 가져와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다.
"엄마, 내가 시장에서 사왔어!"
장바구니에서 꺼내보니 대파, 당근, 감자, 가지, 오이, 콩나물, 애호박이 있다.반찬 고민 중이었는데 충분한 한 끼가 될 수 있는 식재료가 반가웠다.
"어머 아들! 맛있는 거 많이 사 왔네! 고마워! 엄마가 카레도 만들어 주고 콩나물 국도 끓여줄게!"
다 식재료인데생뚱맞은 지우개 다섯개가 보인다.
여섯 살인 우리 아들은 아직 자기 이름만 겨우 쓸 정도이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집에서 누나들이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 지우개를 살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는 지우개가 늘 차고 넘친다.
"이 게 뭐야?"
손에 꼭 들어오는 귀여운 사이즈의 지우개 다섯 개를 손에 쥐고 물었다.
"아아~ 지우개! 엄마가 필요한 거라 사 왔어!"
엄마가 필요한 거. 그 말에 울컥했다.
"엄마 맨날 지우개 필요하지? 이거 내 선물이야. 엄마 써!"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안는 내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며 아들이 말했다.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지우개 묶음을 자주 사는 편이다.
공부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건지 학생들 중에는 지우개 학대범들이 참 많다.
손톱으로뜯고 반으로 찢어버리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유형은 찌르기이다. 연필에 찔리고 남은 까만 자국들 때문에 없던 환공포증이 생길 것 같다. 어떤 때는 구멍에그치지 않고 샤프심이 마구 박혀있기도 하다.
그렇게 막 써대는 탓에 지우개가 참 많이 필요하다.
막내다 보니 손이 참 덜 간다. 어지간한 것들은 누나들이 해주고 바라는 것도 없으니 시키는 것도 없다. 그저 밥 먹고 잠자고 핸드폰만 보며, 낳은 김에 키우는 아니 태어난 김에 사는 아이가 바로 이 아이이다.
먹고 자고 싸고 원초적으로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들은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남의 아이 봐주느라 정작 내 아이에게는 소홀했는데, 이렇게 나도 모르는 새 내 아이가 나를 생각할 정도로 자라 있었다.
"선생님이 지우개도 다 똑같이 챙겨주신 거야?"
"아니, 내가 엄마 주려고 산 건데!?"
"아들, 정말 고마워! 엄마 감동받았어!"
고작 지우개 다섯 개가 뭐라고, 반가운 식재료의 오조 오억배는 더 반가운 선물이 되었다.
"지우개 사고 남은 돈으로 이 거도 샀다! 이거 봐 봐라!"
아들의 손에 딱 들어갈 정도의 조악한 물총과 일회용에 그칠 팽이가 있었다.
자신의 장난감을 포기하고 엄마를 생각하며 지우개를 선택해 준 아들.
괜히 의미는 붙이는 건가 싶지만, 어린 아들의 행동 하나가 나를 단박에 행복의 나라로 데려다준다.
낳은 김에 키우는 모자라고 어리숙한 엄마인 나를 그래도 엄마라고 이렇게 눈에 안 보일 때에도 생각해 주는 아이가 있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