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의 다가구 신혼집은 고생길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자 가난의 상징이었다.
첫 딸이 태어나며 우리 부부까지 세 식구가 사는 신혼집은 내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하고 닦아도 늘 어딘지 모르게 낡아 보이고 더러워 보였다. 그 때 당시 나는 나를 몰아부치는 방법 중 하나로 매일 집을 깨끗이 치웠는데, 청소를 끝내고 돌아보면 별로 티가 나지 않아 허무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나와 같은 날 결혼하고 함께 신혼 여행을 갔던 내 친구네 신혼집은 우리집과 전세가가 같았다.
부산이어서인지 친구네 신혼집은 볕도 잘 들고 우리집보다 훨씬 넓고 깨끗한 신축빌라였다.
같은 금액인데 천지 차이가 나는 두 집의 상황에 나는 커다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었다.
서울살이가 무엇인지, 내가 사는 집은 겨울이면 얼어붙어 현관문도 열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는 단열을 기대하기는커녕 집안팎의 온도차로 인해 생긴 물이 유리에 맺히고 흐르다 결국 늦은 밤에는 문이 얼어붙었다. 아침이면 드라이버와 망치로 문 아래에 낀 얼음을 깨고서야 현관문을 열 수 있었고, 그 후에야 남편은 출근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문이 문제라 생각지 못하고, 출산 후 몸조리를 이유로 보일러를 세게 틀어놓아 그런 줄 생각했다. 한겨울에 우리가 덥게 사는 건가 하며 보일러 온도를 더 낮추어야 하나 하고 고민 했었다.(돌아보면 아이 태열 때문에 온도를 22도로 유지하며 나는 내복 위에 기모 수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때 당시 한 겨울의 가스비도 5,6만원 내외일 정도로 우리는 그다지 뜨겁게 살지 않았었다.)
봄에 결혼 하고 입주했을 땐 몰랐는데, 반년도 채 되기 전에 우리 신혼집은 도배라는 가면을 조금씩 벗고 제 민낯을 보여주었다. 여름의 장마를 지나고 겨울의 결로를 만나며 안방 한 벽이 반쯤은 곰팡이로 뒤덮인 것이다.
먼저 살던 분들이 닦아 두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오려던 운명이라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전혀 보이지도 않고 알아차리지 못했던 곰팡이가 그야말로 대 잔치를 벌였다.
신혼 살림을 넣을 때만 하더라도 집주인께서 도배를 새로 해주셔서 전혀 몰랐었다.
심각한 수준의 그 곰팡이의 존재를 나는 그 집에서 아이를 낳고 살게 되서야 알았다.
그 곰팡이 낀 집에서 사는 동안 딸아이는 13개월까지 모유를 주식으로 먹고 살았으면서도 돌이 지나자마자부터 온갖 병을 다 앓았다.
뽀얗고 윤기나던 피부도 울긋 불긋해지고 긁어 아토피 검사를 받았지만 아토피는 아니라고 했다.
어느날은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119까지 타고 응급실에 가 항히스타민제를 투여받았다.
콧물로 시작하여 기침과 열을 동반하고 설사로 끝내길 반복하는 감기, 기관지염, 폐렴을 반복하여 앓았다.
또, 시즌마다 수족구, 독감 할 것 없이 유행하는 질병은 정말 지긋 지긋하다 싶을 정도로 매번 걸렸다.
이 아이 하나에 매달려 사는동안 나는 아이 피부에 좋다하는 온갖 화장품을 몇 개씩 사 썼다. 천기저귀를 써가며 지킨 소중한 딸아이의 피부였기에 이렇게 망가지는 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늘 열의 끝은 지독한 설사였기에 두 돌이 지나도 몸무게가 겨우 9킬로그램이었다.(키는 작지 않았다)
우유도 거부해서 먹지 않는 아이인지라 미봉책으로나마 유산균을 먹였는데, 비싸다는 거 좋다는 거 고르고 골라 돌려가며 먹였다. 유기농 보리차도 먹였지만 배도라지즙이나 홍삼 등 나도 안먹는 귀한 건강보조식품을 먹이고, 결국엔 진맥을 하고 한약도 지어 먹였다.
실내 건조를 하는데 몸에 좋지 않을까, 유아 식기이니까 하며 세제 등의 모든 화학 제품은 친 환경 제품으로 모두 바꾸었다. 옷이며 장난감, 유모차도 중고로 사거나 얻어쓰는 주제에, 아이와 닿는 것 아이가 먹는 것에는 아끼지 않았기에 딸아이는 우리집 소비의 주축이었다.
이런 내 짠내나는 그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내 딸은 정말 병상일기를 써도 될 만큼 남부럽지 않게 아팠다.
묵은 때가 낀 낡은 집에서 도돌이표에 박제 된 것처럼 계속해서 아픈 아이를 붙잡고, 혼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결혼도 하기 전에 끊었지만 내가 처녀 때 먹었던 많은 술들이 너에게 영향을 준걸까 하는 죄책감을 가졌고,
너의 체온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매번 춥게 입힌 걸까? 집이 추운 걸까? 하는 서툰 엄마인 나를 자책했고,
밥을 안먹고 젖만 찾는다는 이유로 13개월만에 모유를 끊어버린 그 탓인가 하며 고민을 했다.
그러다 내 눈에 들어온 까만곰팡이들.
그제서야 내 아이를 이렇게 아프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이 까만곰팡이들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가난했던 나는 곰팡이가 없는 집으로 이사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나를 만나 네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딸에게 미안하고 미안했다.
결혼으로 인해 마주한 가난은, 부모슬하에서 걱정 없이 살던 내가 매일 겪어야하는 현실이자, 내 딸에게 강제로 물려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유산이었다.
그래서 일까.
내 집을 가졌고 아이도 셋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도 여전히 큰 아이 위주로 살고 있다.
편식하는 큰 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을 사고, 큰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요리한다.
무엇을 하든 첫째가 제일 먼저이고, 어디를 가도 첫째가 가고싶은 곳을 우선한다.
힘든 지난 날을 함께 겪고 버텨준 딸에게 느끼는 전우애이자 동지애를 느껴서 인 것 같다.
또 그에 덧붙인 엄마로서의 죄책감도 한 몫을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까닭으로 딸에게 미안한 점이 많다.
일단 초등 고학년인 큰 아이는 2년째 겨우 태권도 하나만 다닐 뿐, 아직 교과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이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집안 형편 때문이다.농구를 하고싶다, 미술을 배우고 싶다,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 영어도 좀 해야할 것 같다, 실험하는 곳 가보고 싶다 하며 큰 아이가 원하는 것은 많다. 그 원하는 것들을 돈핑계로 후순위로 늘 미루고 있는 것은 엄마인 나이다.
큰 아이는 어딜 가든 데리고 다닐만 하다. 인내심도 있고 지구력도 있어 같이 다니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월경을 시작하기 전에 아빠와 함께 유럽에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얘기했더니, 아이의 마음에 바람이 잔뜩 들었다. 하지만 마음만 빤하지 보내지 못하고 상황만 살피고 있는 게 벌써 2년이 넘었다.
"엄마, 엄마랑 여행가고 싶어."
언제부턴가 큰 아이는 내게 계속해서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모녀 여행은 막내가 태어나기 전인 6~7년 전 제주로의 태교여행이다. 지난 3년간 해외여행은 커녕 나와 함께 단 1박 2일이라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일을 하느라 매여있기에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아빠와 딸들만 간혹 시골집으로 보내거나 숙소를 잡아주어 내보낸다. 나와 함께 집을 떠나는 건 겨우 부산인 외가에 다니러 가는 것이 전부이다.
또 다섯 식구가 된 이후 우리는 당일치기 나들이 정도만 다니고 있다보니 큰아이 입장에서는 나와의 여행이 많이 부족하고 갈증이 날만도 할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그래도 돈 안드는 여행이라도 자주 다녔었으니까.
큰아이에게 저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늘 '엄마가 돈이 없어' 소릴 달고 살고 있는 여전히 가난한 엄마다. 이 지겨울 법도 한 그 소리를 큰아이는 또 알겠다며 매번 흔쾌히 이해해준다. 조르기도 잘 조르지만 안된다는 소리에 포기도 참 빠르다. 이런 포기를 마주대할 때면 나뿐만아니라 아이까지 가난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고칠 수가 없는 현실이다.
큰아이는 자신이 어른들로부터 받게되는 용돈을 쿨하게 엄마에게 준다.(요즘은 좀 컸다고 다 주지 않고10~20%는 떼간다) 엄마 살림하는데 보태쓰라며 내게 바로 가져오는 그 돈을 받을 때마다 나는 또 미안함을 느낀다. (미안하다고 해서 안받진 않는다.)
가난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 나름으로는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 왔고, 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큰아이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많은 것을 아이들을 위해 포기하고 양보하고 있다.
돈이 없다 없다 하면서도 큰 아이 앞으로 보험도 3개나 들어가고 있고, 20살 이후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딸을 위해 10살부터는 매달 꾸준히 주택청약도 넣고 있다. 또 지금은 남편이 운영하고 있는 내 회사도 나중에는 아빠와 동종직업을 꿈꾸는 큰아이에게 물려주려 한다. 딸에게 물려줄 수 있을 정도로 사업을 키우고 유지시키는 게 우리 부부의 목표일 정도로 나름 큰 아이를 위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큰 아이에게 늘 미안하다.
양껏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부족한 엄마여서 미안하고, 나의 서툼으로 상처를 입혀 미안하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딸아이를 생각하면 늘 코끝이 아릿하고 눈물이 훅 하고 차오른다.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라고, 너 아니면 이 남자로부터 진작 도망갔을 거라고, 너는 나한테 왜그러냐고.
상처가 될 말들을 빈번히 해온 나였다. 끊을 수 없는 과거에 매여있어 나는 내 큰 딸에게 사랑보다 미안함을 더 느낀다.
오늘 "엄마는 언니랑 막내만 좋아하고!" 하고 또 소리를 지르는 예삐에게 큰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엄마는 아들인 막내만 좋아해." 라고.
"그런건 아닌데."라고 대답하며 당황한 나를 보더니 큰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엄마, 나도 뽀뽀 좀 해줘" 하며 입술을 내미는데 손으로 막았다.
"넌 이제 많이 커서 입술에 뽀뽀하기는 좀 그래." 라고 말하자 실망한 아이는 쌩하니 돌아서 가버렸다.
솔직한 마음의 소리가 필터링 없이 나온 것이긴 하지만 참 생각 없고 이기적이고 못된 엄마이다.
나의 이런 점이 딸이 나를 곁에 두고도 그리워하는 이유란 걸 알면서도 10년이 넘게 고치질 못하고 있다.
사실 내가 가난한 것은 금전이 아니라 딸에 대한 마음이 아닐까?
나와 닮은 얼굴로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는 아이 얼굴을 보며 오늘의 나를 반성하고 참회해본다.
사랑만 해주겠다고 해놓고 난 또 이렇게 스스로가 한 말도 지키지 못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정이 가난하여 이렇게나 나를 사랑해주는 큰아이에게 상처를 주는건가 싶다.
언제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딸아이에 대한 사랑만큼은 부자가 되고싶다.
이건 노력으로 안되는 걸까. 도무지 이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르겠다.
엄마를 느끼는지 내 팔을 껴안아오는 딸아이를 보니 눈물부터 난다.
나는 왜 부자가 될 수 없는 걸까. 가난한 엄마라 미안하다.
딸,미안해서 더 잘해주고 싶은 내 딸.
항상 가난한 엄마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젠가 네가 했던 말처럼, 사랑해가 아니고 미안하다고 하는 이 마음도 이 말도 미안해.
너의 말을, 너의 마음을 너와 같은 말을 하는 이제야 내가 조금 이해할 것 같아.
엄마에게는 그래도 우리 큰 딸이 언제까지나 또 영원히 1번이야!
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잖아!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 너에게 차고 넘칠 사랑을 줄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