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결국, 사람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
이렇듯 <꼬꼬무>는 단순한 역사 프로그램이 아닌, 여러 사람의 기억을 소중히 모아 새로운 그림으로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조각 모음’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각기 다른 기억들을 한 조각 한 조각 모아 미처 보지 못한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는 작업 말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억의 조각을 모으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한 가지 순간을 더 공유하고자 한다. 꼬꼬무 시즌2에 방영되었던 <YH사건>의 연출을 맡았을 때다. <YH사건>은 180여 명의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근로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공권력에 의해 처참히 진압당한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故 김경숙 열사가 있었다. 자료조사를 위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방문해 김경숙 열사의 일기장과 당시 농성 자료들을 읽어보았다. 그녀의 일기장은 당시 고된 근무 환경에 대한 토로와 삶에 대한 고뇌로 가득했다. 몇 날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졸면서 미싱을 돌리다 손가락에 바늘이 박히는 일은 다반사였고 작업 현장의 효율성을 위해 여공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적나라한 노동환경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역사책에서 배웠던 눈부신 경제 성장 뒤엔 여공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70-80년대 ‘공순이’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오랜 자료조사와 사전취재를 마치고 <YH사건> 농성 당시 가장 주축이 되었던 여공 분들을 직접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사실 그날은 괜히 조심스럽고 긴장이 됐다. 혹시나 말실수를 하면 어쩌나, 그날을 복기하는 것이 고통스럽진 않을까 많은 고민이 됐다.
끼익 ㅡ 긴장도 잠시, 약속 장소로 커다란 SUV 차량이 등장한다. 터프하게 주차한 후 흰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여공 분들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기에 눌리고 말았다.
“아니, 다 지난 일을 뭘 그렇게 듣고 싶어서 그래요?”
앉자마자 나에게 돌직구를 던진다. 그리고 곧바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녀들이 꺼내어 놓은 ‘그날 이야기’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참혹함과 충격 그 자체였다. 속옷이 다 드러난 채로 농성장에서 질질 끌려 나오던 순간까지 같은 여자인 나로서도 듣기 수치스러운 순간들도 있었다. 장장 5시간에 걸쳐 그날을 덤덤히 꺼내어놓고 그녀들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도 우린 그렇게 살 거예요. 그치?”
그러고 껄껄껄 호탕하게 웃는 게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호탕함과 당당함의 원천이 궁금했다. 질문을 던졌다.
"그때의 기억이, 어떻게 보면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비참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실 수 있는 걸까요?"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우린 한 번도 그 순간을 비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편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여공 분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으리라. 착취당한 불쌍한 소녀들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순간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들의 기억 속 <YH사건>은 나의 것과 180도 달랐다. 그건 '승리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혼자서는 보잘것없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 뭉쳐 투쟁했던 바로 그 순간. 동료에 대한 끈끈한 신뢰와 진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그 기억의 조각을 시청자들과 꼭 나누고 싶었다.
그렇다. 역사는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역사의 중심에는 크던 작던 항상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즐거웠어요. 언젠가 또다시 만나요!”
이 언니들(?)의 이 당당하고 호탕한 웃음은 나를 충분히 매료시켰고 그 웃음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지구상의 한 사람의 팬으로서 응원하게 되었다.
<YH사건>에 대한 방송이 나간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내의 과거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코멘트부터 엄마의 몰랐던 인생을 알게 되어 고맙다는 시청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간 우리 사회에 어딘가에 묵묵히 살고 있던 ‘어머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많은 여공 분들에게 연락이 왔다. 그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메시지를 하나 공유해 본다.
어제저녁 SBS 꼬꼬무 방송 떨리는 마음으로 시청하며 울컥하였습니다 그날의 저희 여공들의 감정과 현상을 리얼하게 표현해 주셔서 맺혀 있던 한이 터지는 듯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늘의 큰 축복이 늘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근현대사 책에 <YH사건>은 간략하게 한두 줄로 정리되어있다고 한다. YH사건이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거대한 유신 정권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도 까맣게 몰랐으니까.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딱딱하고 고루하게 역사를 배우기보다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우리의 밥상 앞에서 마음껏 떠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더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