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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쓰 May 25. 2018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거대한 메타포를 해석하는 일, <버닝>

#버닝 #1 #우선해미의경우
사막 노을은 점점 커졌고 점점 더 밝아졌어. 문득 조급해지더라.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노을의 색이 나를 보채는 것 같았거든. 그래, 이 먼 땅까지 와서 나를 보니 뭐라도 바뀌는 것 같디? 나는 결국 웃고 말았어. 너한테 얘기했는지 모르겠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서. 그 뭐라도 되는 것 같은 외국어를 듣고 그저 방관자로 이곳을 겉핡기식으로 구경했는데, 나는 뭔가 깨달을 수 있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러니까 내 모든 웃음은 사실 냉소에 가까웠을 거야. 그 사실을 자각하자 가슴이 아릴 만큼 노을이 부럽기 시작했어. 나도 지금 딱 의식하는 세계만큼 저 빨강 속을 유영하다 어느 순간 훅 하고 전소될 수 있다면. 내 삶은 그저 동화 같은 아이의 삶에 적응하기도 전에 관계가 오염되고 이성은 메말랐고 합리는 시들었을 뿐인데. 섹스, 돈, 혐오와 불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비겁과 유예. 그러니까 도피나 외면.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찾아야 할 것은, 지켜야 할 것은, 남는 것은? 눈을 가린 채 지나가는 현재에 신물이 났다고 표현해도 될까. 난 신발에서 자꾸만 날 괴롭히던 돌멩이를 꺼내 멀리 던져버렸어. 그제야 그 돌멩이가 뭐였는지 알겠더라구. 지나보니 너도 확실히 알겠지? 우리가, 아니 너와 내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걸. 아니 그 모든 거추장스러운 끈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걸. 내가 처음 너에게 말을 걸었던 순간부터 말이야. 자, 이제 진실을 말해봐. 왜 말을 못해?



#버닝 #2 #파주와반포의경우
이 거대한 메타포를 어디서부터 읽어내는 게 좋을지, 아니 그럴듯한 말을 토할 수 있을지 고민한지 한참이었다. 현혹되지 않기 위해 안개를 믿는다고 쓰기는 직시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이 느껴져서. 그러면 파주와 반포로 시작하는 건 어떨까. 파주의 종수, 반포의 벤, 그 사이 남산의 해미? 혹은 제물인 해미, 신인 벤, 신을 살해한 종수? 그도 아니면 존재했던 해미, 존재하게 될 종수, 어디에든 존재하는 벤. 우물의 해미, 비닐하우스의 벤, 벗어던지는 자위의 종수? 버닝을 문학에 가까운 영화라 부를 수 있다면 그 문장은 만연체에 가깝다고 은유하는 일도 가능할 것 같다. 그만큼 이 영화는 어느 부분을 잘라 조각을 맞춰도 이치에 맞아보인다. 동시에 느슨하고 단단하게 함축된 모순이 각자의 창과 방패가 되어 서로를 압박할 수단으로 작용한다. 버닝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깊은 곳 불타는 것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게 그 증거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측면에서 끝내 그러하고야 말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졌다. 온화한 치열함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것 같기도, 지나치게 영화적으로까지 보이는 감각적임은 하루키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이 이창동 감독의 다른 한 걸음일지도 모른다.


#버닝 #3 #그러니까나의경우 #스포주의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종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 글을 썼겠지. 좋은 글은 아니었을 테지만. 종수는 시종 무기력하다. 부당한 대우에 소리 지를 용기도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릴 용기도 없다. 많은 걸 느끼고 곱씹기만 한다. 도주하고 회피할 뿐이다. 언젠가 대단한 글을 쓸 것이어서. 자위는 쉬운 일이니까. 단죄는 단지 소설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허구를 통해서만 그레이트 헝거를 극복할 수 있다. 원본을 외면한 채 모방에만 천착한다. 그것이 맞는 삶인가. 혹은 이것이 옳은 사회인가? 벤은 실체를 제물로 바치는 허황을 실현하지만 종수는 망상에서만 제물을 바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일인가. 버닝을 종수가 쓴 일종의 자위극으로 보는 관점은 처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가깝다. 노을 아래 해미는 완전한 역광 속에서 그림이 되고 끝내 시가 되는듯 싶었으나 노을은 사라졌다.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럽게 우는 일밖에 없다. 그 지점에서 수수께끼를 ‘나를 진진하고 은근히 태워내기 적합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의문에 침잠하지 말고, 그저 수수께끼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되는 거니까. 내 불꽃을 태울 장작은 내가 구할 수밖에 없는 일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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