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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쓰 Apr 08. 2018

나 좀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유정쓰의 영화와 일기 #1 콜미바이유어네임, 2018


#1 #나좀데리러와줄수있어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저질러버렸던 밀고 당기기, 영험한 주문처럼 되뇌이곤 했던 아무것도 아닌 언어들, 빨갛고 또 까맣게 콩닥거리던 모든 기다림. 십 년 전, 당신을 처음 앓았던 여름을 생각했습니다. 나조차 모두 알지 못했던 몸과 마음을 가진 주제에 당신만은 나를 알아주길, 아니 실은 그보다 나를 앓아줬으면, 하고 나는 섣불리 바랐습니다. 첫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는 그것을 그만큼 지독했던 여름 앓이 정도로 듣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정말이지 이 난해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숨 막히는 여름이 계속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거든요.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결코 잊을 수 없던 우리만의 암어가 주는 여운이 무척 깁니다. 지독했던 사랑에 누구나 한 번쯤 가졌을 엘리오의 목소리가, 얼굴이 꽤 오랫동안 머릿속을 헤집습니다.



#2 #당신이알았으면했어요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어떤 것이 사람과 캐릭터의 안과 속을 형성하고 투영하며 마침내 보편적이고 위대한 감정, 그리고 더욱 마침내 숨쉬는 하나의 사랑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어떤 외부적 장애도 없는 사랑 그 자체의 모습이 서사를 이루는 진부한 과정이 이토록 따듯하고 섹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감탄했다. 이 영화는 퀴어 영화가 아니라 첫사랑의 신열에 관한 영화다. 퀴어물에 으레 등장하는 폭로와 굴욕과 시련의 쇼트는 이곳에 없다. 이런 영화에 소수자에 관한 언급을 시도하는 건 이제 조금 촌스럽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캐롤에 멜로라는 장르에 내린 축복이라 썼고 이 영화 역시 축복이라 표현했다. 그래, 인생의 흔한 순간을 깨끗이 잘라내어 푸른 나무와 화창한 하늘에 찬란히 걸어버린 이 이야기는 차라리 축복에 가까울 것이다.



#3 #네이름으로나를불러줘

진짜 시작은 따로 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은밀한 암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으로 들어선다. 호칭은 관계를 정의한다. 당사자도 타인도 확신할 수 없던 추파가 실체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했던 인용구를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초반부, 교수인 아버지와 책을 내려는 올리버는 살구의 어원에 대한 (섹시한) 토론을 벌인다. 살구는 언제나 살구지만 그것이 어떤 배경,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달리 불릴 수도 있다는 것. 내가 부르는 호칭, 우리가 나누는 언어, 그러니까 기호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각본이 이 영화의 정수다. 그렇게 불렸던 사랑이야말로 끊임없이 음미할 의욕이 생기듯, 이런 각본이야말로 자꾸만 되감기하게 되는 것이다.



#4 #네가어떤삶을살든너를응원한다 #조금의역하였습니다

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상은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네 약점을 찾는다. 그럴 때면, 내가 옆에 있다는 걸 기억해다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도 느끼고 싶지 않을 지도 몰라.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내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너는 분명 무언갈 느꼈을 거야.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아마 우정 그 이상일 수도 있지. 난 네가 부럽단다. 내가 어렸을 땐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냥 모든 것이 얼른 사라지길 바라셨다. 자식들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길. 난 그런 부모가 아니란다. 우리는 상처가 더 빨리 나아지길 바라면서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과 시작할 때 그들에게 보여줄 내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게 돼. 그러다 서른살이 될 땐 텅 비어버리게 된단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어지면 안 되잖니. 그게 무슨 낭비람. 내가 너무 두서없이 말했니?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말해줄게. 곧 나아질 거야. 비슷한 감정을 나도 느껴봤지만 너희 둘이 가졌던 그 감정을 다 가져보진 못했다. 어떤 것들은 가끔 날 평생 붙잡아두기도, 영영 날 가로막기도 해. 네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네 일이다. 하지만 기억하렴. 우리의 마음과 몸은 오직 한 번만 주어진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네 마음은 닳아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을 테고. 더 이상 누구도 가까이 오고 싶어하지 않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지금 당장은 슬픔이 넘치고 고통스러울 거야. 그걸 무시하진 마.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그 슬픔을 그대로 느껴보도록 하렴.



#4 #첫번째일기

왓챠에 남긴 영화 수가 네 자리가 되었다. 이 미천한 생 내에서 다섯 자리 숫자의 영화까지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새 눈물이 고였을 만큼 끝내주는 이야기가 천 번째였다는 사실도 어쩐지 고마웠다. 망막 위에 맺히는 단순한 이미지에서 가장 든든한 선생이 된 영화에 오래도록 설득 당할 용의가 나에겐 있다. 이 삶은 언제까지고 잃지 않았으면 한다.



#5 #두번째일기

김춘수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고, 마찬가지로 나는 평소 '호칭이 관계를 정의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특별(할 지도 모르는)한 인연을 만났을 때 항상 상대방의 이름에 만족하지 못하고 호칭 문제를 고심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호칭을 고심하는 것-은 의외로 굉장히 효과가 좋은데, 그건 아마도 우리만이 공유하는 이 새로운 이름이 우리를 튼튼하게 해줄 것이라는 종교적이고 맹목적인 믿음 때문인 듯하다. 나는 또다시 꽃을 만들 수 있을까.



#영화

90회 아카데미 4개 부문 노미네이트, 작품/남우주연/각색/주제가, 각색상 수상

전세계 영화제 79개 수상, 194개 노미네이트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이탈리아 팔레르모 출신,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첫 장편 <주인공들>이 베니스에 출품,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로 많은 상을 탐


#평론가왈

김혜리 온 우주가 합심해 사랑을 가르쳐준 그해 여름

박평식 설렘과 눈뜸, 통증의 이름으로

이지혜 여름이 끝나도 아물지 않는 썬번처럼, 첫사랑은 영화가 끝나도 길게 흉터를 남긴다

송경원 있는 그대로의 사랑, 유일한 순간들로 흘러 넘쳤던 햇살의 시간

이용철 여름이 지나가길 바랐던 난, 계절이 끝났을 때 울고 있었네

임수연 여백을 상상할수록 더 에로틱하고 가슴 저미는, 여운이 독하다

장영엽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주문

허남웅 햇살이 감옥을 두른 찬란했던 첫사랑의 기억

이동진 가득한 햇살로 그 여린 날들을 축복하다


#잡설

그래도 1화랍시고 생각한 것보다 길어졌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길지 않을 거예요!


#홍보

instagram.com/yuzu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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