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술 시험 도전기

프롤로그

by 영우천사
글쓰기는 스무살 이후의 나를 만들었다.


고작 글쓰기가 스무살 이후의 나를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거 아닌가 싶긴 하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특히 아빠)도 그렇고, 우리나라 입시제도의 회의론이나 폐혜를 항상 이야기하곤 했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입시를 피할 수 없는게 운명이라. 나는 단순하게 숫자상으로 드러나는 내신 성적이나 수능 성적으로는 거의 넘볼 수 없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논술 시험이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다닐 수 있게 하는 것도 글쓰기였다. 아무래도 글쓰기라는 행위가 성인 이후의 나를 있게 한 꽤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말 어렸던,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책을 읽는걸 엄청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이미 방의 두 면 전체를 책장으로 채우고도 모자라서 집안에 책장이 더 있었으니 책을 정말 좋아했고 많이 읽었던 것은 확실하다. 다만 그거랑 별개로 독후감 쓰기를 엄청 싫어했다. 초등학생인 나에게 독후감이란 거의 학교에서 매일 강제로 쓰게 시켰던 일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책을 요약하고 느낀점을 써야한다는 틀에 박힌 형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말 귀찮았다. 같은 반에 있던 몇몇 여자 아이들은 독후감을 정말 열심히 제출했는데, 그 정성과 부지런함에 감탄했던 기억이 15년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일기도 쓰기 싫은데 독후감도 같이 쓰라니. 그렇다 보니 글쓰기 자체가 내 취향이랑 가깝다고 생각해본적이 거의 없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오면서 글을 잘 쓴다고 평가를 받는 친구들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적어도 나는 그 범주에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는 초등학교때 있었던 양성평등 글짓기 대회였다. 내 친구가 금상을 받았는데, 주제를 '남성의 역차별'로 잡았다고 했다. 젠더 갈등이 사회 표면으로 올라온 최근에 들어서 남성의 역차별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남성의 역차별이라는 주제를 꺼낸 시점이 2012년이다. 친구의 발상의 전환에 그 때도 놀랐지만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놀랍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는 여자 아이들이 제출한 교내 글쓰기 대회의 글을 보고 있으면 쉽게 따라갈만한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중학교 시절의 나는 방송국에 다니는 아빠의 영향을 받아 컴퓨터를 다루고, 영상을 편집하고, 코딩을 하는 전형적인 이과스러운 일에 빠졌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꿈으로 그렸고, 이공계열 대학 진학도 생각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이과스럽고 T스러운 사고를 하던 시절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이 시절을 뛰어넘지 못할 것 같다.


의외로 고등학교에 가고 나니 선생님과 친구들에게서 글을 잘 쓴다는 평가가 조금 생겼다. 사실 뜬금없었다. 내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특별한 변화를 주거나 의식적으로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남고로 진학했다 보니 여자애들이 다 빠져서 상대적으로 글을 잘 쓰는 것처럼 보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신념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정착된 시점이 대략 그 쯤인데, 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쓰기'라는 행위가 나를 대학을 보냈고, 힘겨운 대학생활을 헤쳐나가는데 엄청 큰 공을 세우고 있다. 입시 논술로 중앙대학교에 갔고, 편입 논술로 고려대학교까지 오게 되었다. 2019년 겨울에 중앙대학교를 합격하고 합격 수기를 네이버 카페 '수만휘'와 재수학원 홈페이지에 올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합격 수기는 논술 시험에 대한 기술적인 대비를 중점으로 작성했었다. 합격 수기를 쓰면서, 논술 시험을 준비하면서 느낀 감정적인 변화나 주변 상황을 남기고 싶었는데 합격 수기의 목적을 감안해서 관련 내용들은 넣지 못했다. 이 점을 매번 아쉬워했지만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미뤘다.


그러던 와중에 브런치스토리를 알게 되었고, 일반적인 블로그와 다르게 엄청 유니크해보여서 작가 신청을 하고 합격까지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미루지 않고 합격 수기를 다시 써 보기로 했다. 마침 합격 수기를 쓴 이후로 고려대학교 편입도 성공했기에 담아야 할 내용이 더 늘었다. 그리고 이제 4학년이 된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과거의 기억 조각들을 모두 떠내려보내기 전에 글로 담아둬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특히, 글쓰기 실력을 유전자에 물려준 엄마한테 가장 감사하다. 그리고 논술로 인생대박(?)을 노리는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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