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이끈 방향

불안보다 두근거림을 믿기로 한 이과생의 이야기

by 유모마일

흔한 이과생으로 물리를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공식과 개념을 푸는 일은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길이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이해는 깊어지는데, 감정은 점점 줄어들었다.


철학을 전공한 엄마와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하시던 아빠. 일찌감찌 예고에 진학한 언니까지.

집 안엔 연필 냄새와 스케치, 그리고 창의적이고 비판적 질문 중심의 대화가 섞여 있었다.

논리와 감각, 생각과 손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오가던 환경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엔 참 귀엽게도 남들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푸는 쾌감에 중독되어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사실 그땐 내가 어디에 가고 있는 와중인지도 몰랐다.

“공부 잘하면 언젠간 선택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뭔가를 외면하며 즐겁게 지냈다.

그땐 그게 ‘학생으로서 잘 사는 법’이라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가고 싶은 대학이 아닌 전공을 써내라고 했다.

만들기를 늘 좋아했던 나는 로봇 공학과를 쓰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구원이라는 게 진짜 평생 할만한 일인가?’

어릴 적 꿈은 발명가였다.

그나마 가까운 전공으로 고른 로봇공학.. 건축가..

안 맞진 않지만 약간 어딘가가 어긋난 것 같았다.


당시 고2 주제에 몰래 다운 받은 클래식 영화를 보고,

수험서 사이에 만화책을 낑겨보며 밤을 지새웠고.

이런 게 사실 진짜 열정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네이버 지식in에 이렇게 물었다.


“뭔가를 만드는 대학 전공이라는 게 있나요?”


그 지식in 질문이 내 인생을 바꿨다.

그 답변 속에서 처음 본 단어가 산업디자인이었다.

낯설었지만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만든다’라는 행위 안에 ‘생각’과 ‘감각’이 함께 들어 있는 단어 같았다.


부모님은 반대했다. 특히 미대를 나온 아빠는

공부를 나름 잘하던 내가 미대에 진학하겠다고 하자,

산업이 거칠어서 생존하기 어렵다고 했고,

늘 뭔가를 만들며 몰두했던 나를 봐왔던 엄마는

그럴 거면 대학은 제대로 가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내가 갈만한 대학은 아예 지원도 못 하게 하셨다.

당연하게 재수를 하게 되었다.


재수학원이 끝나면 미술 실기 학원에 가기 위해 빨간 버스를 탔다. 학원에 있는 친구들이 미술을 시작한 건 대부분 중학생 때.. 이르면 초등학생 때.. ‘나만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왔다. 손끝이 느린 나는 버겁고, 조급했다.


그때 처음으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인생의 본질’과 ‘방향’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홍대 앞 미술학원을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화방이다.

나무 냄새와 붓 냄새 물감 냄새가 퍼져 나오던 곳.

화방 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붓과 물감,

종이의 질감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만지고

붓을 관찰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화방에 가면 그래 여기가 내가 속하면 행복할 곳이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땐 그저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시 미술을 마냥 조용히 열심히 반복했다.

얼마나 수많은 가위눌림을 겪었는지

지금 돌아보면 그 열심의 시절이

내 감각의 첫 번째 밑거름이었다.


그리고 실기시험 날

너무나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손끝의 긴장감이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그날만큼은 나치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과몰입으로,

빠르게 밀도를 높여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정말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90년생, 10학번의 나는

드디어 ‘두근거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맞았다.


대학에서는 자동차 디자인을 선택해 전공했다.

빛의 반사, 형태의 긴장, 속도감 있는 라인.

수학적 비례로 완성되는 아름다움이

내 안의 논리와 감각을 모두 만족시켰다.

늦게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오래 붙잡았다.


어차피 처음 겪는 하위권의 삶이 아니었기에

노력의 기적을 다시 만들고 싶었다.


밤을 새우며 스케치하고 집착스러운 모델링을 하고,

결국 장학금을 받으며 나름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어쩌다 준비한 영국 유학.

얼렁뚱땅 합격 후 받아 든 학비 명세서에는 당시 환율로 1학기에 4.5천.. 생활비 더하면 1억은 들겠다 싶었다. 내 빈약한 유학의 이상과 그 거대한 숫자가 도저히 매칭되지 않았다.

당시엔 그곳에 들어가는 게 많은 한국 학생들의 꿈이었다. 그걸 등록하지 않는 내 자신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친구들이 얘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이해가 간다.

그때의 나는 이미, ‘남들이 꿈꾸는 길’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리듬’을 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건 포기이기도 했지만,

감각적으로 선택한 첫번째 ‘현실감 있는 결정’이었다.


그 선택 이후, 다행히 나는 사회로 나갔다.

2016년, 첫 직장은 대기업 계열사인 광고 회사였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드는 곳이자, 현실과 이상이 부딪히는 현장에서 일하며 그럴싸한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는 BX(Brand Experience)라는 포지션이 현대카드와 배달의 민족 덕에 우후죽순 유행하던 시기였다.


브랜드 철학을 새롭게 그리고 남들만큼 멋지게 만들어보자는 의도로 생긴 포지션이었지만, 조직이 그 깊이를 준비할 만큼의 시간과 기반은 아직 부족했다.


정답 없는 질문 속에서 너무 어린 나이에 디자인 회사들의 클라이언트가 되어 회의실을 오가며, 현실의 타협과 이상 사이를 조율하는 법을 몸으로 배웠다.


그곳에서의 3년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배운 시간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맬 ‘감각과 이성의 교차점’이

바로 그 틈에 숨어 있었다는 걸, 그때는 아직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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