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개콘에서나 볼 법한 망측한 풍경이 영화 밀양 후반부에서 펼쳐질 때 내내 더부룩한 속으로 영화를 관람하던 사람들은 무릎을 탁 치며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던 불편한 진실이 ( 누군가에 의해 ) 말 그대로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 이신애가 가진 분노의 표출은 조롱, 요즘 사람들의 인터넷 언어로 바꾸자면 개드립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무릎을 탁 치며 느꼈던 통쾌함은 이내 사그라든다.
분노가 가진 속성 중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이처럼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봐' 식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시니컬한 조롱이다. 결국 그 태도들이 다시 당사자에게 되돌아갈 때, 그 상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이 '용서'를 해야 하는가? 나는 용서라는 단어만큼 어떤 상황에 있어 기민하게 대처하는 기만도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밀양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이 용서는 끝없이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인간에게 내리는 한 줄기 햇빛이 아니라 그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계속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이상한 주문이다. 그 주문에 빠지면 빠질수록 우리들은 분노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마음의 평화도 얻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 속에 스스로를 갇히게 만든다.
그럼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분노는 있지만 이 분노를 버리지도 못하고 품지도 못하는 상황.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고 박복한 인생의 이신애에게도 한 줄기 햇빛이 내려올까. 나는 신도 아니고, 한낱 인간이기에 어떠한 답도 내리지 못한다. 신애의 상황에 공감하며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창동이 어떤 해답을 정해놓고 영화를 찍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해답이 있었다면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지도 못했겠지. 다만 종찬이라는 인물을 이신애 옆에 붙여놓은 것은 그것이 그 나름대로 신애에게 내려주는 한 줄기 햇빛이 아닐까. 그 햇빛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닐지라도, 구원은 절대자가 아닌, 지난하고 서글픈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으로부터 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