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패밀리는 깊은 몰입을 요구하는 장면과 장면 그리고 아닌 장면 사이에서 심하게 널을 뛰며 가끔씩 시청자를 오그라들게 하는 지성의 작위적인 연기만 제외한다면 모든 주조연의 인상 깊은 열연과 함께 드라마 상의 세트장소나 실제 촬영지, 소품, 의상을 보는 시각적인 재미도 컸던 작품이었다.
사실 방영 전 예고편을 보면서 나는 제목 작명 센스에 한 번, 대한민국 상위 0.01%에 해당하는... 상상치 못했던 그들의 리그가 펼쳐진다... 재벌 드라마라고 못을 박는 홍보 문구에 두 번, 어이없어서 웃으며 저걸 누가 보고 싶어 할까 생각했었는데, 재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 사이에서 무슨 암투가 벌어지는지, 재벌들이 어떤 돈 놀음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이유 탓이었다. 더더구나 충분히 능력 있는 감독과 작가, 배우들이 있어도 제작 환경 때문에 좋은 평을 듣는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가서는 힘없이 고꾸라지는 경우가 대다수라 애초에 시작하지를 말아야지 싶었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되면서 의외다 싶었던 것은 로열패밀리의 재벌이라는 소재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야 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재벌이라는 키워드는 드라마에서 중요한 핵심이었는데, JK사람들의 난잡한 난투극과 김인숙의 과거와 엄기도 한지훈의 관계가 생각보다 톱니바퀴 맞물리듯 매끄럽게 진행됐다는 점은 분명 이 드라마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원작 소설의 영향인지 드라마에서는 김인숙과 관련하여 '증명'이라는 단어가 대사로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원작에서 몇 가지 소재만을 얻었을 뿐 내용 자체는 소설과 다르기 때문에 증명이라는 단어가 이 드라마에서 의미가 퇴색돼 남발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나 싶다. 명확한 선과 악의 경계가 이미 사라진 로열패밀리 속, 아귀다툼으로 모두 개미지옥에 빨려 들어간 족속들에게 인간의 증명을 따지기보다는 결국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로열패밀리에서 JK 사람들과 김인숙, 엄기도, 한지훈 서순애 그 밖의 과거의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선과 악의 대립보다 인간을 만드는 '관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봤을 때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약간의 사실과 수많은 오해와 의심, 불신과 죄책감, 명확하지 않은 믿음 같은 것들이고, 이것들이 관계를 형성하여 극단으로 치달을 때 생겨나는 선과 악의 개념이 그제야 활력을 띄게 된다. 아쉽게도 드라마가 초반부터 계속 외치던 '인간'의 증명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흥미롭게 끌고 갔던 로열패밀리의 모호한 결말은 드라마의 균형을 깨뜨렸다.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마무리된 결말은 마치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온 김인숙이 원했던 인간의 존엄이 증명되는 순간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김인숙은 연민의 대상이되 인간의 존엄이 실현되는 인물은 아니어야 했다. 드라마 내내 증명이라는 단어가 김인숙과 가까웠던 이유는 김인숙이 과연 면죄부를 받을만한 자격이 되는가를 묻고 있는 것과 같다. 이미 스스로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한 JK사람들과 다르게 죄책감으로 평생을 불운과 불안으로 살아와야 했던 김마리와 김인숙이 자신에게 면죄부를 줄 기회조차 계속 박탈당하고 스스로 박탈시켰다는 점이 그녀가 인간의 증명을 보여 줘야 할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인간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의심과 오해, 사실을 가장하는 거짓 같은 것들이라면 가장 인간의 증명을 요하는 김인숙은 말 그대로 희생양이 되어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증명은 그랬다. 안타깝게도 이 드라마에서 증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이었지만.
이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암투극과 김인숙의 과거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불분명한 러브라인이다. 왜 엄기도는 김마리를 그토록 보호하고 지켜오고 있었을까. 한지훈이 김인숙을 바라보는 감정은 사랑일까. 다른 드라마가 이 감정을 익숙하게 사랑으로 정의하고 시작한다면 로열패밀리는 알 수 없는 죄책감, 연민과 사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그게 사랑인지 연민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랑은 없고 단지 인간들은 서로의 추악한 면면들을 바라보면서 연민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재미있게도 만약, 사실 사랑 같은 것은 없고 너희들이 하는 사랑은 다 연민이니 죄책감 같은 것들이야 라는 로열패밀리의 러브라인 공식을 다른 드라마들의 러브라인에 적용시킨다면 그건 정말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재력가와 평범하다 못해 찢어지는 가난을 겪고 있는 서민이 툭하면 우연적으로 만나서 하는 사랑이 오히려 내가 보기엔 연민 같아 보이니 말이다. 사랑에 빠진 재벌에게 그거 연민이야 모르겠어?라고 소리치는 옛 연인이 오로지 질투심에 눈이 멀어 하는 말은 꼭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