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
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
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
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
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
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
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휴학하고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나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종교라는 실체에 대해 아주 조금은 깨닫게 됐다. 그전까지는, 건강이 좋지 않은 동생 때문에 행여 차별한다는 소리를 나중에라도 들으려나 부모님은 굳이 나는 올릴 필요가 없다는 스님 말씀에도, 우리 남매 이름을 어렸을 적 같이 절에 올렸지만 정작 나는 내가 믿는 신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 신을 절실하게 찾을 정도로, 내 삶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 신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인간 중심의 삶,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깨달은 양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삶을 사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의 존재라면 늘 내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신이라면 생각해본 적이 없다. 1년에 한두 번절을 가곤 했던 우리 집 사정도 아마 이에 한몫했을 것이다.
죽음의 한 연구는 힘들었던 작년에 샀던 책이다. 나름 힐링용 이리고 생각하고 샀었는데 첫 장의 이 문장을 접하자마자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책을 읽는 건지, 아님, 한문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을 접할 때마다 한문의 뜻을 찾느라 다섯 장을 채 못 넘기고, 읽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때 이 문장만큼은 평소에 책 읽는 습관을 버리고 계속 이해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던 것 같다. 가까스로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런 글도 쓸 수가 있구나 감탄을 했었던 것 같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철저하게 자기혐오를 지닌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 같았다. 여전히 지금의 나 또한 절을 자주 가는 불교신자는 아니다. 다만 평생 살면서 그 실체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인간의 믿음에 대해 아주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기회가 나한테도 왔던 것 같다. 절의 불상 앞에서 절을 하며 순간 울컥하여 눈물이 나왔던 내 모습도 결국에는 그저 믿음이 필요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을 이해했다고(진짜 이해는 아닐지라도...) 생각했을 때, 가슴이 먹먹했던 것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누군가한테 위로를 받고 있다는 느낌. 가끔은 알 수 없는 실체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