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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X Jan 06. 2017

찰리 카우프만과 폴 오스터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 폴 오스터의 소설 속, 관계로부터 튕겨나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등장인물들은 이들의 영화나 소설 안에서 매우 느리고 조심스럽게 세상과 조우하며, 너무나 더딘 속도로 타인들과 접촉에 성공했다가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묘한 변화와 함께 닫힌 열린 구조의 이 기이한 결말은 물질에는 닿지 못하고 관념과 관념 사이로만 길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소설가는 매우 명확한 어법을 구사하면서 때로는 유쾌하게 고립을 그려낸다. 거품을 덜어낸 꾸밈없는 솔직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외로움의 내성에 대해 묘사하면서도 섬세하게 구체적으로 인물과 사건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이들의 일상성에 대한 사유는 상당히 독특하다. 밖과 안의 구조가 모호해지면서 영화 <어댑테이션>의 스토리는 <어댑테이션>의 각본 그 자체가 되고, <시네도키, 뉴욕>에서 케이든의 삶은 연극이 되면서 영화 안에서 정교하게 허구의 층위를 쌓는다.

짐머 교수의 삶이 헥터로 인해, <죽은 남자의 회상>과 <마틴 프로스트>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 그도 헥터처럼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책으로만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되는 <환상의 책>은 마치 이언 매큐언의 <속죄>처럼 책의 작가와 서술자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찰리 카우프만과 폴 오스터의 작품은 명확하게 형식적으로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고립이라는 모호한 관념의 형태를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서사와 함께 명확하게 묘사해내지만 또한 그것을 글로 설명하기는 난감한 부분이 많은 탓이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이들의 형식과 내용이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어서 형식적인 부분을 언어로 잡으려다가 그것이 곧잘 내용으로 넘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이들의 작품에서 내용적인 측면이 형식을 결정하면서 그것의 결합과정이 일정 부분은 직관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그렇다면 두 작가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한 부분이 가장 매력적인 이유는 결국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시각적인 이미지를 뛰어넘고 소설이 텍스트를 뛰어넘어 직관의 영역에 도달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더더구나 그것의 시작조차 모호한 관념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더더욱 대단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주위의 평범한 사물과 공간 인물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책을 덮고 계속되는 씁쓸한 여운에도 혹은 작품들을 감상할수록 눈에 보이는 반복되는 패턴에도 이들의 허구적 세계가 계속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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