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좇는다

본 시리즈

by XX




<본 슈프리머시> 후반부, 네스키의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어둑해진 저녁 하나 둘 불 켜진 아파트를 배경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나가던 제이슨 본의 뒷모습은 미국의 반성이나 본의 슬픔이라는 진부한 설명보다는 본의 굴레 그 자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본 아이덴티티>에서부터 시작된 본의 자아 찾기 여정의 끝에서 본이 기억을 되찾으며 보게 된 것은 암살자로서의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그 살인에 대한 후회는 본으로 하여금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에게로 이끌게 하지만, 조작된 진실을 믿고 있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는 본의 모습은 속죄나 본의 인간애보다는 결코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암살자로서의 본은 의심할 여지없이 본의 아이덴티티중의 하나이자 현재의 그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기에, 죽인 자는 없고, 죽은자들과 홀로 남아 그 불명예를 홀로 감당하고 있는 딸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본의 속죄는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렇게 연민과 합리화의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한 시선을 유지하며 본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뇌를 풀어낸 <본 슈프리머시>는 관객들 스스로가 본의 속죄를 이해하게끔 만든다. 본인이 <본 슈프리머시>를 본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유이다. 마치 모큐멘터리처럼 철저하게 감정의 배제로 개인과 집단을 표현하는 영화의 방식 덕분에 관객들은 미국 정부의 만행, 정부의 의미, 권력집단, 불법행위, 사생활 침해를 현실 속 이슈와 연결시키며 본을 암살자임에도 일종의 안타까운 피해자로 인식을 하게 된다. 본 시리즈 1편과 2편에 집중된 자아 찾기를 연민 없이 세련되게 풀어낸 셈이다. 그 후, 관객들이 궁금해하는 마지막 진실과 완벽한 영화적 구성으로 끝을 맺은 <본 얼티메이텀>까지, 본 트릴로지는 본 시리즈의 시그니처, 특징적인 액션씬과 본의 굴레를 촘촘한 시나리오와 대담한 연출로 시각화시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영화가 나올 필요 없는 완벽 그 자체였다.


가득 찬 기대감으로 작년 8월에 극장에서 관람했던 <제이슨 본>은 본의 굴레를 이미 트릴로지에서 다루었던 트레드 스톤 작전을 다시 되살리며 난데없이 아버지의 진실 찾기와 엮는다. 본이 트레드 스톤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누군가의 설계로 인해 암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영화의 설정은 본의 아이덴티티였던 암살자라는 정체성에 균열을 낸다. 암살자와 속죄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아슬아슬함을 오가며 그 균형을 잘 오갔던 트릴로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다. 왜 제이슨 본이 트레드 스톤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영화가 설명하지 않았던 그 빈 틈을 누군가는 상상력으로, 누군가는 빈틈 그대로 놓아두며 존재했던 많은 가능성들은 이제 사라졌다.


니키 파슨스, 파멜라 랜디의 빈자리를 채우는 헤더 리는 권력욕, 욕망은 있지만 그 욕망이 구체적으로 헤더 리를 어떻게 만드는 가는 전혀 없는 빈껍데기 같은 캐릭터에 멈춰있다. 그녀의 욕망은 대사와 행동으로 그 순간순간 표현될 뿐, 헤더 리라는 캐릭터 그 자체를 채워주는 알맹이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본을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이용하는 위선 뒤에 오히려 본에게 당하는 어리숙한 모습은 정확히 영화가 헤더 리를 어떤 캐릭터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인지 더 애매하게 만든다.

연인이었던 마리, 지시를 받고 작전에 이용당하는 수동적인 모습에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기 시작했던 니키, 강단 있게 자신의 신념을 따라 밀고 나가는 랜디. 개성과 역할이 분명했던 여성 캐릭터들과 다르게 헤더 리는 이러한 여성 캐릭터들의 대체재에 불과한 엉성한 캐릭터로 남아버렸다.


그 밖에 저격수의 다혈질과 무식함을 표현하는 도구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라스베거스의 스와트 장갑차의 쓸고다니기액션씬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감시로 주제는 한층 현대화되었음에도 식상한 스토리... 다시 돌아온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제이슨 본>이 본 시리즈에 흠집을 낼지 누가 알았겠는가.


제이슨 본의 캐릭터와 영화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의 시리즈를 만들지 않는 것이 트릴로지 보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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