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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길 Mar 06. 2022

나는 싸우고 싶다

애정을 배우는 과정

"넌 아주 혼구녕이 나야 해."

"이렇게 위협감 없는 협박. 재밌다."

대학 선배 H와 나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스스로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게 핀잔 어린 말을 뱉는 H지만 혼을 내겠다는 위협적인 말과 달리 그의 눈빛엔 늘 애정이 서려있다.


나보다 학번이 하나 위인 H 대학교 전공 수업에서 처음 보았다. 성적을  받으려면 적어도 교수에게 밉보이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대부분 교수에게 순응하는 태도로 수업에 임했다.  성적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수의 말에   하는 방식으로 임하는  교수에게도 내게도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는 편한 이었다.


내가 H를 기억하는 건 그는 늘 교수와 싸웠기 때문이다. 적막함을 깨고 교수를 부르며 손을 드는 건 늘 H였다. 교수의 시선을 따라 H를 바라보면 벌써부터 눈빛에 불만이 가득했다.

"교수님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차별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의 변명이 이어질 때도 H의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교수와 H의 공방이 탁구공처럼 오갈 때 나는 H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나라면 어땠을까. 저런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한다 해도 배시시 웃으며 말끝을 흐리거나 밉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겠지.


H 함께 듣는 수업이 끝나면 빠르게 돌아서는 H 뒷모습을 보며 채플을 갔다. H 검정 가방에 달려 있는 귀여운 배지를 보며 웃음기 없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러니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SNS 친구 추천에  H 내가 먼저 팔로우하면서 말의 물꼬를 트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빠르고 차가운 말투와 달리 그 내용엔  애정이 서려 있었다. 세상은 망했다고 냉소적으로 말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고 인생 쉽지 않다고 한탄하면서도 삶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는 식이었다. 선인장도 죽였던 나에게 자취방 가득 화분을 가져다 둔 H는, 힘든 날마다 뜬금없이 선물을 보내오는 H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상태를 물어오는 H는 참 애정이 많은 사람이구나 했다.


삭막한 세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려면 남한테 관심 둘 새가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삶이 메말라갔다. 오랜만에 본 지인들에게 아무리 웃어 보여도 그들은 내가 전보다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며 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쳇바퀴 돌리듯 먹고 살 걱정만 하다 보니 효율만을 쫓아 움직였고, 흥미 둘 곳이 없어졌고, 웃을 일도 줄었다. 도무지 애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 슬퍼졌다.


H는 애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내게 그러거나 말거나 애정을 부어줬다. 그가 애정 하는 화분을 돌보듯. 매번 밥을 사고 커피를 사며 내 지갑은 꺼내지 못하게 했다. 나같이 재미없고 삭막한 후배와 이야기하면서도 시시때때로 표정이 변하는 게 신기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게 지론인 내게 H에 대한 빚이 자꾸 늘었다. 돈을 벌어 애정 하는 사람에게 붓는 게 낙이라는 H는 앞으로도 나를 먹여 살릴 거라고 장난스레 말했다.


먹여 살린다.

나는 먹는다는 말보다 ‘살린다’는 말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시들시들한 내게 애정을 부어주는 사람. 그 애정으로 나를 살리고 있는 사람. 애정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걸 나는 H를 통해 배웠다.


불만 어린 표정으로 들던 손을 내게 뻗어주는 H를 보면 나도 누군가와 열렬히 싸우고 싶어 진다. 무언가에 애정을 두고 그를 지키기 위해 손을 들고 싶어 진다.

H. 그가 오래오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애정 어린 눈을 하고 불만스러운 말투로 쏟는 H의 핀잔을 오래오래 듣고 싶다.

그가 부어준 애정을 양분 삼아 더 큰 나무가 되어 그에게 아낌없이 그늘을 내어줄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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