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관계에 대해
항상성. 그것은 무섭다. 스스로를 돌보겠다는 결심도 잠시, 나는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이전으로 돌아갔다. 조급하게 스스로를 몰아치는 버릇은 졸업과 동시에 기세를 더했던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글을 쓰는 요즘, 스스로와의 관계는 어떠냐는 질문을 듣고 한참 벙쪘던 건 이런 기세 탓이었을 것이다. 관심조차 두지 않던 나와의 관계. 어쩌면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는 핑계로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누군가는 이제 겨우 3월이라 할지 몰라도 내게는 벌써 3월. 올해의 1/6이 지난 시기다.
1/6, 1/4, 1/3... 언젠가부터 일 년을 기준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부지런히 가버리는 시간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뒤쳐지는 나의 성숙도.
그러고 보면 나는 나를 늘 어떤 존재에 뒤쳐지는 사람으로 보고 답답해했다.
시간이란 물리적 존재와도 다투고 있는 나.
각자의 속도가 있는 거라는 말에 나는 유독 담담하지 못하다.
남들의 선택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
그중 배우라는 직업은 외모부터 실력까지 평가받는 게 일상이다. 평가의 기준도 제작자에 따라 가지각색이기 때문에 어느 한 수치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 수 있는 건 나의 역량을 키우며 선택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수없이 떨어지는 오디션에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
성질이 급한 내게 길게 보고 기다리는 일,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평가를 감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지만 이 직업을 선택한 이상 별 수는 없다.
어제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그동안 무언가를 이루게 해달라는 요구, 왜 들어주지 않냐는 원망을 주로 했는데 어제는 그냥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뒤쳐지는 나의 속도, 이뤄지지 않는 일들, 틀어지는 계획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냥 거기에 무너지지 않고 걷게만 해달라고 빌었다.
스스로에게 바라는 게 많았던 나는 ‘왜 이루지 못하냐’고 묻고 질책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왜 이루어지지 않지?'라는 말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꼭 이뤄졌어야 한다는, 내가 이룰 수 있었다는 전제가 숨어있고, 그 안엔 자신에 대한 과신과 오만이 숨어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과정을 통해 과신은 불신으로, 오만은 절망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했다.
항상성을 생각하니 스스로의 노력 없이 불신과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겠다고 느꼈다.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팔랑거리는 정신과 신체에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그래야 긴 긴 인생을 오래 완주할 수 있겠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나의 삶을 마주하는 것도 헉헉거리며 무거운 몸을 움직이는 것도 괴롭고 땀이 나는 과정이지만, 조금씩 나의 근육이 성장하고 있다고 믿으면 잠시의 고통을 즐겁게 감내할 수 있다.
결과보다 과정을 보자고, 과정을 감내하는 나를 기특해하자고 다짐하는 요즘, 나는 다시 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급여를 받으면 새 운동복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