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 당신께
대학교에 입학하고도 몇 년 동안 꿈속에선 고등학생이었어요. 저는 유난히 몽중 시차를 맞추는 데 약하거든요. 교복을 입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주어진 시험지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곤, 아득한 정신으로 눈을 뜬 적이 한두 번 아니지요.
간밤에 꿈에서 당신을 봤어요.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지만 꿈속에선 종종 당신과 함께거든요. 참 웃긴 게 현실에선 시험지같이 아득했던 당신이 꿈속에선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마치 평소에도 그랬다는 듯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고, 웃죠. 그래서 한동안은 밤마다 당신이 미웠습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다가도, 잔뜩 망가져버리고 싶던 날들이었어요. 시를 읽는 마음으로 유서를 쓰고,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시를 읽곤 했으니까요.
한동안은, 이유 없이 집 앞을 서성이기도 했답니다. 그 짧은 새에 거닐던 곳이 많기도 하더군요. 혹시 그 가운데 당신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다 문득 화가 났습니다. 아, 오해는 말아요. 당신이 아니라 제 스스로의 미련에 화가 났던 거니까요.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사이 마음과 발에는 드디어 단단한 굳은살이 자리했어요. 나름 영광의 상처랄까요?
언어로 채우던 시간은 켜켜이 침묵 주간이 되었습니다. 네. 침묵이요. 깊은 침묵. 사실 속에선 끊임없이 언어가 끓어올랐지만요. 떠오른 것들을 그대로 두고, 가라앉는 것들도 그대로 두며, 최대한 맑은 마음을 건져보려 애썼습니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 이것은 그 둘이 맞닿은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여과할 것이 참 많았어요. 당신은 내게 ‘벌’이었다가, ‘선악과‘였다가, ’ 마약‘이었다가, ’ 기억‘이었다가, 마침내 ’ 사랑‘이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 확신은 없어요. 전 사랑을 여전히 모르니까요. 다만, 이제는 정말 당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과의 경험이 제게 온 건 그럴 만한 일이었다는 걸 압니다. 드디어 한 뼘, 아주 작게나마 그릇이 커진 것 같아요. 그래서 애틋하게 고맙습니다.
당신이 만들어준 그릇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용기와 여유를 한 줌 얻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냉소적이었던 스스로의 철없음에 이제는 너털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전보다 밥도 든든히 먹고, 자주 걷고,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돌봅니다. 이 시기가 더없이 귀해요.
성당에서 미루던 당신의 행복을 빌고, 오늘은 오래간만에 술을 좀 마셨습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지금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네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들 하지만요, 저는 억지로라도 이 아픔을 사랑으로 결론짓고 싶습니다. 이제는 진심으로 미움 없이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전하지 못할 이 마음이 어떻게든 닿길 바라요. 새로운 인연을 향한 당신의 진심이 통하길 바라요.
꿈꾸는 미래엔 여전히, 아니 이제야 사랑이 자리했습니다. 그 모든 사랑의 우선엔 ‘나’가 있을 거예요. 이제는 상관없을 당신의 삶도 감히 그러길 바라봅니다. 이제는 꿈속에 나타나지 않아도 됩니다. 한 조각을 내어줘서 고마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2025년 6월의 끝자락에서
빛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