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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은 Jul 14. 2022

8. 수용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나


[철학자] 원인론에 입각한 사람들, 이를테면 일반적인 카운슬러나 정신과 의사는 그저 "당신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과거의 그 일에 원인이 있다"라고 지적할 뿐이야. 나아가 "그러니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라고 위로하는 걸로 그치지. 쉽게 말해 트라우마 이론은 원인론의 전형일세.

[청년] 잠시만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트라우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가요?

[철학자] 단연코 부정하네.

[청년] 세상에! 선생님은, 아니, 아들러는 심리학의 대가라면서요?

[철학자]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 분명히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 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 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중략) 가령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이혼한 사람이 있다고 하세. 이는 사계절 내내 18도를 유지하는 우물물과 같이 객관적인 사실이지? 하지만 그것을 차갑게 느끼느냐 뜨겁게 느끼느냐는 '지금'의, 그리고 주관적인 사실이라네.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태가 정해지는 거지.

[청년] 문제는 '무엇이 있었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요?

[철학자] 그렇지.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네. 시계 침을 되돌릴 수 없어. 만약 자네가 원인론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과거에 얽매인 채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을 걸세.



-<미움받을 용기>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중-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말이 나는 싫었다.

그것은 내가 겪은 일과 그로부터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저 내 사고의 나약함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던지는 굉장히 무책임하고, 얕잡아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분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싶은 이 마음이 그저 어린 치기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렇게밖에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다.


끝내 나에게 일어난 일련의 모든 감정들, 원망, 불안함, 서러움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 주체는 나이기에,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비로소 과거의 내가 계속 반복 재생되는 비디오가 아닌,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철학자] 물론 태어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지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 전부 내가 택하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것들은 꽤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불만도 있을 테고, 다른 사람을 보고 "저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었는데" 하며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되네. 문제는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네. 자네는 지금 여기에서 *생활양식을 알게 됐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네 책임이야. 여태까지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도,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것도 모두 자네 판단에 달렸지.

*아들러 심리학에서의 생활양식(life style)은 삶에 대한 사고나 행동의 경향을 가리킨다.


[청년]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시 선택할 수 있나요? "네가 그 생활양식을 택했으니 당장 다시 선택해!"라고 한들 그 자리에서 바꿀 수는 없잖아요!

[철학자] 아니, 자네는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니야. 인간은 언제든, 어떤 환경에 있든 변할 수 있어.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중략) 조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긴 해도, 지금 생활양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어. 비유하자면 오래 탄 차를 운전하는 상태인 거네. 다소 덜거덕거려도 차의 상태를 고려해가며 몰면 되지. 하지만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새로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눈앞의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게 되지. 더 힘들고, 더 불행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즉 인간은 이런저런 불만이 있더라도 '이대로의 나'로 사는 편이 편하고, 안심되는 거지.

[청년]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철학자]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청년] ‥‥‥방금 또 '용기'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자] 그래.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미움받을 용기> 첫 번째 밤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중-


'행복해질 용기'를 만드는 기간 동안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무기력하게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고,

게임에 미쳐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를 켜고선 잠이 들기 직전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가련한 여주인공마냥 비를 맞으며 엉엉 울면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욕이 난무하는 일기장을 휘갈기기도 했으며,

죽는 게 얼마나 아플지 감히 가늠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수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억울함의 모양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왜 나는 이런 일을 당해서 이렇게 힘들까'에서

'왜 엄마, 아빠는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제자리에 있나'로.


혼자 우울에 빠져있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우울에서 나오고 싶었다.

바닥에서 헤매던 힘을 기반으로 비로소 나를 위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변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인정하는 연습부터 했다.

새엄마를, 그리고 새아빠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

엄마 둘, 아빠 둘, 총 4명의 부모님을 두었다는 것.

막 태어난 내 동생들은 비록 아빠는 다르지만, 내 둘도 없는 형제라는 것.


가족은 그 형태가 어떻든 가족이라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만들었던 꽉 막힌 울타리를 넓히고, 호칭을 바꾸고, 대하는 방식을 바꾸고, 다른 사람에게 이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소개하는 방식을 바꿨다.

어색하고, 힘들고, 쑥스럽기도 했다.

다른 가족들이 변화를 눈치채고 유난을 떨까봐 걱정하기도 했다.(다행히 그런 일은 크게 없었다.)


이따금 불만스러운 마음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노력하는 것을 잠시 쉬기도 했다. 다그친다고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들도록, 불현듯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대해 끊임없는 반박을 거치면서,


그렇게 오랜 기간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받아들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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