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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Oct 19. 2024

나와 나의 알로카시아의 시간

불안장애를 겪습니다






나는 나의 알로카시아를 잘 모른다.



올봄 엄마가 나누고 심어 들려 보내준 녀석은, 알아서 여름을 잘 났다. 나는 그저 응애가 끼면 닦고, 큰 잎이 누렇게 시들면 잘랐다. 새 잎들이 올라왔고, 매일 번지듯이 펼쳐졌다. 응애가 다시 생겼고, 잎이 잘린 줄기는 갈변하고 말랐다. 어떻게 할 참인지, 손바닥만 한 이파리 한 장만 남긴 채 알로카시아는 잠잠하다. 가을잠을 시작하는 건가, 이렇게 놔둬도 되는 건가, 줄기도 잎도 내지 않는 채로 가을과 겨울을 난다면 그 사이에 물은 줘야 하는 건가. 모르는 것은 불안하다.



알로카시아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 읽는다. '한계가 있겠지만 도움이 되겠다' 생각하는 한편, '도움이 되겠지만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기껏 보살핀 것이 녀석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알 수 없다. 못해서 못할 때도 있지만 잘해도 못할 때가 있다. 내 힘 밖의 일, 불안의 영역이고, 나의 불안의 끝에는 죽음이 아니라 '죽게 함'이 있다.



잎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며, 생명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분명 녀석이 살아가는 과정이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죽어가는 느낌이다.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므로 버겁다.



나와 나의 알로카시아 사이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사는지, 어떻게 하면 다행히 죽지 않는지 알 수 있는 시간. 죽지 않고 산다는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 그래서 잃는 모습도 충분히 견딜 수 있게 하는 시간. 그 시간이 녀석과 나 사이에 지나갈 수 있도록, 죽지 마라, 죽지 마 주문 같은 말을 툰 시처럼 읊조린다. 매일 아침 나의 알로카시아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와 당신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나와 당신을 살게 하려는 마음, 그 미세한 사이를 휘청이며 는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우리를 잘 모른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시간이 지날 동안, 새봄 같은 마음을 더 품어야겠다. 가을을 지나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봄이 와 있을지도, 나의 알로카시아와 당신 안에는 죽음보다 생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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