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

by 보통사람

초등학교에 신규발령 받아 왔을 때의 일이다. 십여년 동안 해가 바뀌어 가며 수 백명의 아이들이 선생과 제자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중에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 기억의 대부분은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많은 친구들인데. 그 미안함이 아직까직 기억에서 놓아주지 못하게끔 하나보다.


그 중 한 아이에 대한 기억이다. 유독 얼굴이 까맣고 키가 작은 남자 아이었다. 5학년즈음 되었음에도 3학년 정도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냥 키가 작으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아이가 부모님없이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참 먹어야 할 때 많이 먹지 못한 것 때문에 키가 작아진 건가 싶어 안쓰러웠다.


그 아이는 말이 없었다. 무언가 물어보면 씨익 웃는 게 전부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방과후 교실을 운영중이었는데 보육원 아이들은 전부 방과후 교실 수강권이 나오기 때문에 강의를 듣고 늦은 시간에 하교를 했다. 보육원 아이들은 모두 '종이접기' 강좌를 수강하고 있었다. 아이는 내가 퇴근할 무렵. 종이접기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와서 말없이 내게 애써 접은 종이를 선물이라며 씨익 웃으며 주고 갔다. 그것을 종업식 하기 몇 주 전까지 반복했다. 나는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언젠가는 종이접기 전시회를 해주어야지'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는 마음 한구석에 언젠가는 해줘야지. 언젠가는.. 하면서 시간은 지나갔다. 그 해. 발령 후 첫 제자들을 탈없이 올려보냈다는 기쁨과 허전함 등을 갖고 교실로 돌아와 교실을 정리했다. 교실을 정리하면서 교실 구석에 있는 캐비닛을 열어보니 그 곳에는 내가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그 아이가 내게 매주마다 주었던 종이접기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날려버렸다.





그 작던 아이는 이 일련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아니면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잊혀지지 않았다. 내 스스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충분히 주기엔 너무 어렸고, 많은 것을 베풀기엔 가진 게 너무 적었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가는 더 어른이 되면 아이들을 사랑하고, 언젠가는 더 많은 것을 갖게 되면 많이 베풀어야지. 이런 생각들. 당시에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른보다는 막 이제 교대를 졸업한 어른의 탈을 쓴 학생으로 여겼다.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아이들에게 나이도 밝히지 않았고 더 어른같이 보이고 싶어 군대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뭐가 쑥스러웠는지.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20대에 학생들에게 말했던 것 처럼. 군대를 다녀왔고. 결혼도 했으며 두 아이의 아빠도 되었다. 겉보기엔 누가봐도 어른이었다.


누가봐도 어른이었는데 여전히 미숙했다.


더 부자가 되고 싶은 갈망에 초조했다. 그 갈망에 눈이 흐려져 사기를 당했다. 돈을 잃은 것도 모자라 자존감이 떨어져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나늘 사랑하지 못하니 가족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른이 되어 있을테고, 어른이 되고 나면 당연히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을만한 역량이 쌓여 있을 줄 알았는데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기 사건으로 인해 당시에는 내가 나락으로 떨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니 그건 나를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던 나 스스로에게 더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연습할 수 있는 하나의 문제가 제공된 셈이었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풀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하지만 내게는 이 어려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많았다. 어느 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아들들의 롤모델이 되어주고 싶었다.


또 교실에서 마주하게 될 아이들에게도 넉넉하고 따뜻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십여년 전. 내 잘못으로 인해 종이접기를 전시해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내게 준 아이가 또 다른 이름을 달고 내 앞에 교실에서 나타나게 될 터였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어.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에게도 줄 사랑이 많이 없구나"라고 아이를 스쳐보낼 수는 없었다.



사기 당한 경험은 내게 좌절을 주었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수 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거쳐 내 자존감은 바닥에서 하늘로 날아올랐고. 자산은 10배 가량 불어났다. 그리고 나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사람은 각자마다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 어려움의 정도와 크기도 제각각이다. 누구는 직장을 잃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 누구는 금전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하고 누군가는 회사에서 일이 잘 안풀리기도 한다. 각자마다의 어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도 다르다. 나는 사기를 겪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했던 기록들이 일반화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안다. 나를 충분히 사랑하게 되면 샘솟는 자기애는 주변을 향해 퍼져나간 다는 것을. 그리고 주변으로 퍼져나간 사랑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온다.




나는 이제 진짜 어른으로서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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