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방영한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에는 남극지방에 서식하는 여러 종의 동물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항제펭귄의 삶이 흥미로웠다.
황제펭귄은 수컷이 새끼의 알을 돌본다. 암컷으로부터 수컷이 알을 이어받아 발에 올려 놓고 몇 개월 동안 품는다. 그 기간 동안 암컷은 바다로 나가 영양보충을 하고 돌아온다. 대부분의 새끼는 2개월 가량 수컷이 정성껏 돌본 덕에 잘 자라나 알에서 깨어나고 성장한다. 극지방의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황제펭귄은 허들링이라는 행위를 하는데.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있는 펭귄들이 서로 돌면서 안쪽과 바깥쪽의 위치를 바꾸어 준다. 살을 바짝 맞댄채로. 당연히 안쪽에 있는 집단이 따뜻하지만 욕심부리면서 안에 머무를 수는 없다. 바깥의 펭귄이 추위로 인해 죽게 되면 그 다음은 안쪽이 되기 때문이다. 추위를 견뎌낸 황제펭귄 새끼는 바다로 떠나간다. 자신의 짝을 찾아서.
이 펭귄들은 이런 삶의 싸이클을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닌데. 몸 속에 박혀 있는 DNA에 의해서 당연하게 행동한다. 물론 그들에게 직업따위는 없다. 생존과 번식이 최우선의 목표일 뿐이다.
그랬다. 오직 인간만이 직업을 갖는다. 황제펭귄의 예가 꼭 아니더라도 모든 생명체는 생존에 유리한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간다. 지구에서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모든 동물을 통털어 일부 영장류의 사회화 또는 분업에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사람과 같이 직업이라고 불릴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생명체는 없다. 사람들은 직업을 갖는 게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자본주의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프레임인가.
아무래도 후자라는 의구심이 갈수록 강해져 갔다. 책을 읽을 수록 세상은 내게 더 큰 꿈을 펼치고 나아가라고 하는데 현실은 월급의 굴레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직장에 출근해서 월화수목금을 보내고 토일 이틀을 쉬고 다시 타의로 일주일 단위의 노동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현실을 돌이켜 볼 때에면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로서 내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딜가나 이런 이야기는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이런 반응은 특히 부모님으로 부터 나왔다) 당연히 월급받아 사는 게 뭐가 이상하다거나(동료들로부터 나왔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할 교사가 노동의 관점으로 직업을 바라보면 안된다는 훈계를 받기에 딱 좋았다(이건 나 스스로도 항상 걸리는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모순적이게 교직에서 나이가 들어 아이들을 위해 일한다는 교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돈'때문에 힘들어도 견딘다는 게 내가 몸담고 있는 집단의 일관되고 보편적인 반응이었다.
오늘 너무 힘들었다. 이게 매일의 대화 주제였다. 20대의 열정과 패기는, 30대의 관성으로. 40대의 무기력으로. 50대의 생존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발령이래로 꾸준히 목격해왔다. 그것을 전문성의 결여로 돌리기엔 너무 구조적이었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엔 거대한 담론을 빠뜨리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교직 사회에서 행복한 건 학교장뿐이었다. 나 역시 전문성을 쌓고 열정을 잃지 않으면 외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믿음에는 금이 갔다. 사기당하기전이었다면 외면했을 문제들이었다. 당연하다고 치부했을 것들이었다.
'세상에 힘들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어디있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원래 힘들일이다.'
'교직 만큼 보람찬 일이 없다'
하지만 본질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문제로부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것. 그게 문제였다. 직장생활을 하는 샐러리맨에게 있어 직장의 테두리는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위치에 언제나 피동적으로 머물 것을 강요받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강요가 교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 무렵의 나는 발칙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쟁취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부의 크기를 키워야 했다. 직장을 속박이 아닌 선택의 문제로 바꾸고 싶었다.
나는 속박이 싫었을 뿐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일을 생존을 위한 타의가 아니라 내 의지로 이어가고 싶었다. 돈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쟁취하고 난 뒤의 교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어졌다. 꼭 도망치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택하길 원했다.
사기를 당했고. 그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던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나를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