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없이 미궁을 헤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해외는 일본 도쿄였다. 나는 당시 군입대를앞둔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자취방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방학을 끝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나와 내친구는 불과 3주남은 방학을 불태우고자 해외여행을 기획했다. 서로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에 초보자가 여행하기 좋고, 지금 당장 떠난다고 해도 비행기 값이 저렴한곳을 정해야 했다. 그렇기에 가까우면서도 여행하기 좋고, 우리나라와문화적으로도 비슷한 일본을 선택했고, 오사카와 도쿄를 고민하던 중 일본의 현재를 보고자 도쿄를 정했다.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비행기표를 사고, 대강의 여행루트를 짰고 친구는 그에 맞는 예산을 짰다. 우리는 4박5일동안 80만원을들고 도쿄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환율 100엔당 1350원의 살인적인 환율이었다. ) 결심을 한 지 2주만에 우리는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아는 일본어라고는 스미마셍, 도꼬데스까, 아리가또 뿐. 그리고 우리의 사춘기에 다져진 몇 가지 일본어가 고작이었다. 그때는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잘 풀릴것 같았다. 지도도 있었고, 미리 모든 준비를 갖추고 떠났기때문이다. (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
2009년 8월, 우리는 스마트폰이 이제 막 뜨기 시작한 그 해, 핸드폰 하나 없이도쿄 지도하나 달랑 들고 도쿄에 도착했다.
2017년 현재는 없어진 제도이지만,스이카 카드와 신주쿠역까지 가는 특급열차를 패키지로 외국인에 한정해 파는 것이 있었다. 거기까지는어떻게든 성공! 바디랭귀지의 힘으로 무사히 우리는 신주쿠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의 계획은 신주쿠역 근처에 미리 알아봐둔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걸어서한정거장인 신오쿠보역으로 걸어가 그곳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푸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라면 12시30분에 역에서 음식점으로 향하여 점심을 먹고 2시에서 2시반쯤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신주쿠라는 미궁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모든 것이 순탄했다. 우리는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신나게 서로를 찍어주고 있었다.
미궁에 들어가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미리 실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의잘못인 것일까. 신주쿠역이 이런 젓 같은 곳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신주쿠역에내리자 어마어마한 인파들이 마치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듯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엄청난 급류들이 서로한데 엉켜 섞여 있어 자칫 잘못하면 어디로 휩쓸려 갈지 모를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렇다쳐도 신주쿠역을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구글맵은 알지도 못하던 그 당시, 폴더폰이세상의 전부인줄 알던 당시에 우리에게 맛집이 적혀있는 지도만 있었다. 그 지도는 그냥 신주쿠역 옆 어느쯤에있다고 표시만 되어있을뿐. 몇번 출구로 나와야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당시 나의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딱 이 구절이 정확한 것 같다. 일단 한쪽 급류에 휩쓸려 우리는 정처없이 미궁을 떠돌았다. 실없이 떠도는 미궁은 미노타우루스에게 잡아먹히기 안성맞춤인 존재들이었다. 도무지알 길이 없자, 나는 일단 아무 출구라도 나가서 밖에서 찾아보자고 친구에게 제안했다. 이미 역에서 진이 다 빠진 친구는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돈 관리는친구가 맡고, 길안내는 내가 맡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책임감과 긴장감이 치솟았다. 더불어 첫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순간이었다. 출구로 나와도 문제였다. 여기가 도무지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지도에 보이는대로 대충 어림짐작하여 신주쿠를 떠돌았다. 얼마나 헤맸을까… 우리는겨우 찾던 맛집을 발견했고, 그때 시간은 오후 2시30분이었다. 우리는 미궁에서 무려2시간을 헤매고 겨우 길을 찾았던 것이다.
한가지 좋았던 점은 저녁에 다시 제대로 신주쿠 구경을 하러 왔을 때 우리는 무리 없이 길을 질주했다. (나중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 하지만, 다시 신주쿠역에 떨어진다면 나는 실없이는 도저히 그 역을 빠져나올 자신이 없다.
스마트폰이라는 실이 생긴 후, 나는 어떤 여행을 가도 이 실을 붙잡고다닌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