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분석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저는 취향이 없습니다.
아니 누구나 좋아하는 게 있지 않아?라고 물어보신다면 좋아하는 게 없거나 다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모든 걸 다 좋아한다. 그중에 조금 더 좋아하는 건 있지만 딱히 취향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영화 장르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본다고 하고, 어떤 분야의 책을 주로 보냐고 물어보면 책이면 다 본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넓고 얕은 것을 지향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게 취향이라면 취향이랄까.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마도 알파고 이후 빅데이터가 대세가 되고 난 후부터) 큐레이션이니 취향 분석이니 하면서 AI 혹은 선별된 에디터가 나의 취향을 분석하거나 따로 챙겨주는 서비스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경우도 관심 있는 주제를 분석해서 먼저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고, 큐레이션 서비스들이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나조차 나의 취향을 모르는데 누가 나의 취향을 단정 짓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특히 자칫하면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를 얻게 되거나 취향이란 게 생기기도 전에 취향이 정해져 버리거나 혹은 취향이 될지도 모르는 주제에 다가가기조차 못할 경우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개인적으로 어리면 어릴수록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거나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을 경험하며 사고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향을 단정 지어버리면 더 이상 확장이 불가능하다. 그냥 AI에게 나의 취향을 맡겨버리는 수동적 사고로 변질될 우려마저 있다.
게다가 나처럼 취향이 없어서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취향 분석은 매번 비슷한 종류의 취향을 선별해주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틀에 갇혀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취향을 분석한다고 해도 과거의 나를 분석하는 것일 뿐
취향을 분석하고 큐레이션 하여 고객에게 제안한다고 하지만, 과거의 경험을 종합해 나의 취향을 판별하는 것이지 새로운 경험이 쌓여서 새로운 취향이 만들어지지 못한다. 일본의 한 개그맨은 우연히 출연한 예능에서 마라톤을 접하고 마라톤에 푹 빠져서 결국 캄보디에 귀화하면서까지 국가대표로 뛰었다. 캄보디아에서 온 피아피는 우연히 남편이 치던 당구를 접하고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되어 전국대회에 우승하는 실력으로 성장했다. 만약 이들이 AI의 취향 분석을 통해서 당구나 마라톤을 추천받을 수 있었을까? 우연이 겹친 것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고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20대까지는 취향을 만들기에는 과거의 경험이 부족하기에 더욱 다양한 경험을 만들어야 하는데 취향을 특정지어버리면 소중한 다양성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다.
반대의 관점의 중요성
유튜브를 보다가 정치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소위 진보 쪽 영상을 보았는데 그때부터 진보 쪽 주장에 관련된 영상만 계속 추천받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진보에 관한 주장으로 내 관점은 옮겨졌고 보수 쪽 주장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의도적으로 보수 쪽 영상을 보면서 서로의 주장이 다르고 왜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쪽 입장만 듣는다면 반대쪽 입장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책을 볼 때도 한쪽의 주장에 대한 책을 읽었다면 반대의 주장을 하는 책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관점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사고의 확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무조건 좋은 것도 없고 무조건 나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취향 분석에 정 반대 취향을 분석해주는 것이 없는지 아쉽기도 하다.
모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아쉬움
여행을 갔을 때 구글 지도를 펼치고 전혀 모르는 주변 길을 아침에 조깅하며 둘러보곤 한다. 지난 후에 여행에서는 충동적으로 후에 옆 해변까지 오토바이 타고 달렸다. 어느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 추천하지 않았던 루트였다. 개인적으로 아침 조깅에서 햇살과 함께 만난 보석 같은 카페에서 마신 커피가, 무작정 달린 오토바이 여행에서 만난 염전 마을이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만났을 때 두려움도 있지만 그만큼 경외감과 새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취향을 분석한다면 이러한 모험의 즐거움이 사라질까 두렵다. 취향을 분석해주거나 큐레이션을 해주는 것 자체가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는 재미를 없애는 것이 아닐까. 물론 우리는 바쁘고 시간이 없어 모든 정보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니 누군가 정리해주는 것이 편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만의 정보를 탐색하고 새로움을 아는 재미는 귀찮고 시간이 걸리지만 큐레이션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미지의 정글을 탐험하는 것을 상상하며 고고학자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처럼 무언가 새로움을 찾고,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 획득하는 성취감을 느껴보는 것도 삶을 살아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하기
이건 뭔 관종 아님 별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예스라고 할 만큼 완전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가 보기에 멋지게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 보기에 찐따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전에 미움받는 용기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힐링받은 책이었지만 뒤이어 볼수록 불편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취향을 분석받는 것이 좋고 혁신적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을 강요하는 트렌드에 불편했다. 인류가 지금껏 생존한 것도 다양성이 이어졌기 때문이고 혁신과 발전이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사회가 다양한 것을 포용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획일화된 교육과 사회가 얼마나 혁신을 방해하는지 그 누구보다 한국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노라고 하는 것에 불편하지 않고 포용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는 취향이 없다.
그렇기에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금방 관심이 식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런 내가 몹시 싫었다. 나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한 번쯤 푹 빠지는 마니아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몹시 후련하다. 취향이 없는 것도 취향이라 생각한다. 한쪽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에 관심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차리리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취향이 없습니다. 대신 모두 제 취향입니다. 전부 다요. 그러니 존중해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