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 스타트업 적응기 2
출판사 마케팅 직군에서 일을 하면서 이런 저런 고민이 쌓여갈 때쯤, 스물 스물 다시 IT쪽 서비스 기획 일을 하고 싶어졌다. 돌아보니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은 서비스 기획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다른 일을 하느라 벌써 2년 넘게 업무 공백이 생겼는데 다시 IT 분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웠다. 특히나 트렌디한 IT업계에서 어리고 똑똑한 친구들 사이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더 이상 지체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안되겠다. 이직을 해야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IT 업계가 계속 성장하고 있어, 이에 따른 인력 수요도 여전히 큰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주변에 마흔 후반, 오십에 가까운 선배 기획자들, 선배 개발자들이 의외로 아직까지 회사 잘다니고 이직도 착착 잘하고 있는 점이 큰 응원이 되었다. 용기를 내서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이력서를 다듬었다. 다시 도전이다!
지인의 추천으로 지원한 스타트업은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진 회사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숨겨진 알짜 기업이었다. 운이 좋아 서류는 합격...그런데 문제는 면접.
이 회사, 글로벌에 오피스가 있어 영어를 써야 한단다. 컨퍼런스콜도 업무 메일도 영어라는데! 일상 영어는 하지만 업무를 영어로 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면접을 앞두고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라 광화문 한 어학원에서 1:1 과외 코스를 신청했다.
비즈니스 영어 1:1 과외요! 완전 초 단기 속성으로요!
제가 다음주에 면접이라서요ㅜㅜ
내가 받고 싶은 수업은 자기 소개, 업무 메일, 컨퍼런스 콜, 프레젠테이션 이렇게 네 가지 였는데, 어학원 직원은 내가 딱 원하는 커리큘럼이 없다며 나보고 직접 커리큘럼을 짜오란다. 두둥...
뭐 아쉬운건 나니깐, 꾸역 꾸역 시키는대로 상황별 대본도 만들어 가고, 못하는 영어로 블라블라 말도 하고 교정도 받고... 짧은 4회의 수업 동안 속성으로 과외를 받았다. 거의 10년 만에 입 밖으로 말해 본 영어라 거지같은거 나도 아는데, 영어 선생님은 a와 an 구분부터 공부하라며 잔소리를... 네 압니다. 암요. 근데 제가 좀 많이 급해요.
면접은 예상밖으로 순조로웠다. 면접관과 대표님이 보살같은 분들이라 공격적인 질문은 없었고 나의 장점을 많이 봐주셨다. 직전 회사에서 전혀 다른 업무를 했던 것에 대해서도 문제삼지 않았다. Lucky Me!
이렇게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마지막 관문 "영어 좀 해보실래요?"
정확하게 뭐라고 답변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지금은 조금 부족한데 배워서 잘 할 수 있어요. 걱정마세요. Don't worry!" 이런식으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여유? 다른 말로 하면 뻔뻔 레벨이 올라간다는 것.
합격입니다. 출근하세요.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합격 통보를 받고, 서른 아홉의 나는 다시 서비스기획자가 되었다.
스타트업은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