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쁘다"라는 말은 설명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
반대로 "안 예뻐"라는 말을 듣는다면 상황에 따라 최고로 기분이 다운될지 모른다.
지난 주일 오후예배 후에 한 참만에 친구와 함께 카페를 찾았다.
막 주문한 커피가 나오려던 차에 예배시간이라 무음 설정해 두었던 탁자 위의 휴대폰에 불이 켜진다.
또렷이 "친정아빠"라고 휴대폰 화면에 저장된 글귀가 뜨자 먼저 본 친구가 "친정아빠네" 전화받으라고 했다. 순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얼른 친구 앞에서 받게 되었다.
휴대전화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친구에게까지 닿을 듯 과장이 넘치게 말하는 친정아빠는 "어이 이쁜ㅇㅇ냐?" 하며 이름을 불렀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주변에 누가 있나?라는 스치는 생각과 묘한 마음에 "예?"라고 반문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친정아빠는 들었을지 못 들었을지 말을 쉬지 않고 이어간다.
"집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크고 좋은 게 있어서 너한테 좀 보내려고 하는데 새로 이사 간 집주소 좀 보내라" 나는 멋쩍게 "좋은 건 아빠 드시지 보내려고 그러나요"라고 말해버렸다.
알 수 없는 감정 속에 세상 불편한 순간이었다.
친정아빠가 나에게 시골에서 농사지은 농산물을 보내는 일은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편했다. 고구마와 할아버지 산소옆에 있는 감나무의 대봉시 감을 따서 한편에 함께 보내겠다는 말이었다.
일주일 전 육지에 올라가 친정집을 지나는 길목에서 그냥 갈까? 하다가 그래도 친정아빠 얼굴 한번 보고 밥 한 끼 같이 하면 좋겠다 싶어 남편과 들렀고, 텃밭에 고구마순을 따온 일이 있었다.
그런 일 때문에 내가 고구마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내 나이 마흔하고 아홉이 돼서야 친정아빠가 되고 나서야 "이쁜 딸"인 걸까? 왜...
마흔아홉 전에는 친정아빠에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나를 키워주신 내 할머니 하부 지는 늘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ㅇㅇ"라고 했었다. 수없이 들어온 "이쁘다"는 말은 소위 넘치게 지겹게 들었던 말이 너무나 익숙한 말이 왜 이리 어색하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괴롭기까지 하며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할머니 하부지 덕분에 내 아이들에게 늘 "이쁜 내 새끼"라고 부른다. 진짜로 이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어제도 난 밥을 먹는 막둥이 아들의 눈을 보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쁜 내 새끼를 여기 엄마 눈에 다 담아버리고 싶어"라며 진짜 사랑을 표현한다. 이제 스므살이 된 막내아들이 지그시 웃으며 작아지는 눈웃음도 그냥 사랑스러워 끌어안고 싶지만 밥을 먹어야 하니 행동 조절을 해야만 했다.
사춘기 시절에도 난 한 번도 아빠가 생각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늘 불편한 아빠가 어느 날 내가 살던 곳으로 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의 생활은 점점해 불편해져만 갔다. 어린 나의 삶에는 아빠가 없었기에 그리고 한 번도 나를 보러 찾아오지 않은 아빠였기에, 결혼 후에도 한 번도 내가 사는 곳에 딸의 집이라고 찾아온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학대하거나 나에게 욕을 하거나 나를 대놓고 괴롭힌 적은 없다. 다만 아빠가 부재였던 어린 날의 아빠보다 더 많은 추억을 함께했던 절친을 만나지 못하는 아픔이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니 할머니 하부지가 살아계셨을 땐 어른들의 속을 썩이는 게 눈에 보이는 조부모의 아들이 미웠던 것이다. 남처럼 살아온 날이 너무 길었는데 중년이 된 내게 "이쁜 딸"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어색하고 힘든데 친정아빠도 어쩌면 힘든데 입 밖으로 내뱉어 본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보낸다던 그 택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택배가 도착하면 또 한 번 떠오르겠지.. "이쁜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