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어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나에게 감사할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엄마도 없지만 아빠는 1년에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그저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면서 그 세상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시골살이 그야말로 '머루랑 다래랑 따먹으며 청산에 살어리랏다' 하던 한평생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그때는 평생감사가 무언지 몰랐지만 이대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어느 날, TV의 만화영화 중 "달려라 하니"를 보다가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니를 늘 격려하던 홍두깨 아빠를 보며 나는 아빠를 배우던 시절이다. 서울 한강에서 대화하던 만화의 한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나에게도 아빠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별안간 할아버지 할머니께 서울에 가서 살아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유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나를 위해 나의 발전을 위해 나는 더 크고 싶다는 또렷한 분명하게 말씀드리니 아쉽지만 허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드디어 시골 골짝 학교를 정리하고 전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엄마와 친아빠 남동생 둘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도 살아 보겠다고 짐을 싸 들고 들어간 것이다. 훗날 생각해 보니 네 식구 단란히 살던 곳에 새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폭탄이 하나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난 아주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2킬로 미터쯤 되는 거리에 학교가 있었는데, 차비가 60원이던 시절이다. 철저한 할머니의 절약 소비생활이 몸에 밴 나는 그 돈을 아껴보겠다고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산길 같은 언덕배기를 지날 땐 무섭기도 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등허리에 업혀 나누던 대화를 기억하며 참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 큰 꿈을 꾸었던 것이 이루기도 전에 2달 후 나는 다시 시골 학교로 돌아왔다.
이유는 나의 큰 꿈은 어디로 가버리고 소소한 삶 속에서, 한 번도 아빠와 새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살아 본 적이 없었고 더욱이 아빠랑은 못 살겠어서였다. 오히려 새엄마와 남동생은 어색하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다. 어느 날 아빠의 말씀이 내 마음에 돌을 던지듯, 혼내는 말 중 한마디가 내 안에 새겨진 것이다.
"네가 오지 않았을 땐, 두 남동생들이 생활을 잘했었는데 내가 온 후로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역시 나 때문이었구나 그 말을 들은 후로 자꾸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실제로 할아버지께서 한 달쯤 지났을 때 내가 너무 보고 싶어 서울에 올라오신 것이었다. 나는 참았던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 내려야 했다.
할아버지도 내가 너무 보고 싶었다며,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지만 다음날 학교에 다녀오니 할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시고 계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고 할아버지는 시골로 다시 내려가셔야 했다. 그 후로도 나는 최선을 다해 생활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며 나는 꼭 멋진 사람이 될 거라며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공부도 어려운데 더 어려운 게 기다렸단 듯이 날 힘들게 했다.
시골에서 전학 온 나는 세상 촌스럽고 못난이가 아니었을지 싶지만, 못난이처럼 행동하지 않기 위해 누가 날 못생겼다고 하면 너는 더 못생겼다고 당당하게 돼 갚아주는 당돌한 시골 아이이기도 했다가, 난 오히려 더 "그래 나 못생겼다 어쩔래?"라며 지지 않으려 했다.
그땐 예쁜 아이의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머리카락이 길고 예쁜 원피스를 즐겨 입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남자 친구들은 그 여자아이가 제일 예쁘다며, 난 머리도 짧고 원피스가 아닌 바지를 즐겨 입어서 못생겼다는 기준에 아주 충족한 아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사실 내 눈에도 그 친구는 예뻤다라기 보다 눈은 새우 눈만 하고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한 아이였다. 내 생각은 예쁜건 내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웃음)
실제로 예쁜 원피스와 긴 생머리는 내가 어떻게 커버해 볼 수도 있었다지만, 나는 아빠와 새엄마에게 얹혀사는 신세라고 생각하니 원피스를 사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설령 원피스를 입었더라도 짧은 커트 머리는 당장에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시골에서 전학 오기까지 했으며, 말끝마다 사투리가 쏟아지는 나는. 또래 친구들의 눈에는 예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가 죽거나 움츠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생활도 잘 해냈지만 내가 견디지 못했던 말이 아빠로부터 듣는 "너 때문"이라는 단어는 나를 가장 나약하게 만드는 말이었던 것이다. 두 달째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다시 서울에 오셨다. 그러고는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셨단다. 서울 셋방 집 옆방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학교 다녀온 나의 내 손목을 이끌고 내게 단단히 이르셨다.
"할아버지가 널 데리러 오셨데 여기에서 살겠다고 말씀드려"라며 나를 타이르셨다. 세상에 나는 나를 구하러 온 구세주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은 나와 할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께서 내 손에 천 원을 쥐여 주시면서 내일 학교로 가지 말고 택시 타고 큰아버지 집으로 오라 셨다.
그랬다 아빠의 말은 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너 때문"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줄 몰랐던 것이다. 말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