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허약했고, 가장 불행했던 화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 1884–1920)의 예술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재탄생된다. 안타깝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강인한 예술성을 인정했고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그룹의 상징적인 존재로 추대하게 된다. 그는 35년뿐인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영원히 남을 시적인 도상을 창조한 천재적인 화가였다.
어느 날, 화가 수틴(Chaim Soutine)은 친구 모딜리아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평생 당신에겐 불행이 참으로 많았죠. 안 그런가요?"라고. 그러자 모딜리아니는 친구의 질문이 못마땅하다는 톤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아니,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게 한 건지? 난 언제나 행복했던 사나이였답니다." 그의 대답과는 상반되게 그의 삶은 비참했다.
모딜리아니는 추운 방에서 피를 토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고 병 치료를 거부했다. 그가 죽을힘을 다해 제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술과 마약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의 여인 잔느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1898-1920)의 사랑이었다.
잔느와 모딜리아니의 첫 만남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몇몇은 1916년 말로 추정하고 또 몇몇은 1917년 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17년, 잔느는 19세였다. 그녀는 몽파르나스의 콜라로시 아카데미(Colarossi Academy)에서 데생을 공부하던 미술학도였다. 두 연인은 잔느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둘의 만남을 쉬쉬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4살 연상인 남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할 부모는 없었다. 나이 차이도 문제였지만 모딜리아니는 가난한 화가였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여기 1919년에 제작된 그림 <잔느 에뷔테른>을 보자. 친구들은 잔느를 ‘코코넛’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머릿결이 붉은빛이 돌았고 안색은 너무나 하얗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개성적인 화가의 꿈을 꾸던 아름다운 마음씨의 예술학도였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와 함께 예술을 논했고 사랑을 나눴다. 그 무엇보다도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으로 끌어안아주었다.
1918년 잔느는 첫째 딸을 낳았고 얼마 안 되어 둘째 아이를 가졌다. 그림 속의 잔느는 둘째 아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녀는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많이 불러온 배 때문에 의자에 제대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는지 오른팔로 간신히 지탱하고 앉아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길쭉한 얼굴의 리듬은 어깨로 굽은 선을 타고 내려와 넓은 치마폭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후경에 표현된 빨간색 문으로 인해 굽은 선과 직선의 조화가 아름답게 빛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눈동자가 없는 그녀의 눈빛에선 공허함 그리고 아픔이 느껴진다.
모딜리아니의 붓엔 주황색과 노란색도 선택되었다. 모딜리아니는 이 따뜻한 색채처럼 그녀의 인생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잔혹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1920년 1월 24일에 숨을 거뒀다. 그리고 이틀 뒤 1월 26일 절망에 빠진 잔느는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모님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21세. 그리고 그녀는 임신 8개월째였다.
너무나 아픈 삶을 살다 떠난 연인과 홀로 남겨진 한 아이 그리고 태어나지 못한 또 다른 아이의 슬픈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