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사라진 후, 우리의 공간이 내 공간으로 변했다. 그 쓸쓸한 공간에서 홀로 지내는 나는 모든 것이 귀찮을 뿐이다. 일어나는 것도 귀찮고 씻는 것도 귀찮고 심지어 먹는 것조차 귀찮다. 그렇게 2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나의 상태를 잘 표현한 그림이 있다. 바로 1898년에 제작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의 <화장하는 푸풀 부인>이다.
그림을 보자. 날이 밝았다. 이불속에서 나온 여인은 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피로에 쩔어 있다. 웃음을 잃어버린 여인은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이다. 잠에서 덜 깬 상태임에도 몸단장을 해야 하는 생활고가 느껴진다. 퉁퉁 부은 얼굴의 눈빛은 거울을 향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더 비참하다. 하루하루 더 망가져가는 몰골이 보기 싫다. 그럼에도 머리부터 손질을 해야 하는데 손놀림이 부인의 마음처럼 상당히 무겁게 움직인다.
전경에 칠해진 흰색과 녹색이 섞인 푸른빛은 그나마 화면에 가벼운 느낌을 발사한다. 그녀의 무겁고 고단한 삶이 조금이나마 가볍게 느껴지길 바라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반대로 갈색 공간은 답답한 부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시들시들 시들어 가는 자연, 말라죽는 자연, 부패하는 자연은 암갈색으로 변한다. 여인은 지금 갈색의 네거티브적 영향에 기가 눌렸다. 피곤한 심신은 버거운 갈색의 무게에 더 억눌린다.
갈색은 자연의 색이다. 대지의 색이다. 밝은 황갈색은 마음을 포근히 보듬어 주는 장점도 강하다. 따뜻하게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도 있는 색이다. 차분히 삶을 다시 계획할 수 있는 공간의 색으로 갈색은 최고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삶이 고달파 배터리가 방전된 사람은 갈색의 긍정적인 부분을 받아들일 그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다. 여기 화장하는 푸풀 부인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처럼 말이다.
가끔 궁금해진다. 나의 남은 삶에도 다시 포근한 갈색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지금은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