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실루엣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한 가족을 상실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그럼에도 가족은 서로 보듬으며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1년, 2년, 3년, 시간이 지나며 차츰 새로운 삶에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한 가족에게 연이어 죽음이 닥친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상상도 하기 싫은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불행한 가족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 바로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다. 그는 5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누나는 그가 14살 때 떠났다. 뿐만 아니다. 남동생은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하늘은 이 가족에게 왜 그렇게 잔인했던 것일까. 화가 뭉크는 얼마나 많은 물음을 하늘에 던졌을까. 얼마나 많이 외쳤을까. “왜?”
죽음에 대한 그의 공포는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여기(아래), 에드바르드 뭉크의 <카를 요한의 저녁>을 보자. 어둠이 내린 밤이다. 하늘을 뒤덮은 보라색 빛이 인상적이다. 짙은 보라색은 세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까지 떠도는 색이다. 길 잃은 영혼들이 보랏빛 속을 방황한다. 이처럼 보라색은 미스터리 사건을 암시하는 색이다.
건물을 뒤덮은 붉은색의 의미도 심상치 않다. 도대체 카를 요한의 거리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화가는 왜 오슬로의 시민들을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표현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이 거리를 빨리 빠져나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이 느껴진다. 퇴근 후 녹초가 된 시민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무서운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다. 초조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퀭한 눈에선 그들이 느꼈을 공포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불빛이 도시의 어둠을 밝히고 있지만 그들이 느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던 것일까. 얼른 안전한 공간으로 피신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들이 피신하고 싶은 공간은 어디일까? 바로 가족이 기다리는 집일 것이다.
오른쪽 공간에 시선을 돌리면 홀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가 보인다. 검은색 실루엣으로만 표현된 이 남성은 외로워 보인다. 보라색 공간을 떠도는 길 잃은 외로운 영혼을 보는 것 같다. 이 검은 실루엣에 외로웠던 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힘들었던 화가의 삶이 표출됐다. 나는 이 검은색 실루엣에서 나를 보게 된다. 삶의 길을 잃고 홀로 헤매는 나.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나. 차츰 어울려 산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나. 그렇다. 나는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숨으려 했다. 그렇게 2년을 지냈다.
지금은 나에게 내려앉은 이 어둠을 걷어 내려 노력 중이다. 차츰 걷히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남편이 없는 집에서 느끼는 공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집은 남편이 있을 땐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가두는 공간으로 변했다. 나는 이 공간에서 외친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