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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테의 꽃 Sep 18. 2022

화양연화(花樣年華)

가곡 「첫사랑」_김효근 시·작곡

https://www.ajunews.com/view/20200517172417979


얼마 전 직장 동료가 카톡방에서 '화양연화' 어쩌고 하길래 오래전 양조위, 장만옥이 출연했던 중국 영화를 말하는 줄 알았다. 근데 넷플릭스에도 2020년 TvN에서 방영했던 동명의 드라마가 있길래 출연진이 마음에 들어 정주행 하게 되었다. 평소 TV를 잘 안 보는 데다가 호불호가 강해서 내 취향이 아니면 쉽사리 시간을 소모하지 않는 편인데 재작년 그 어수선했던 코로나 시국에 이런 작품도 있었다니 당시 본방사수를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쉽다. 이제는 청춘이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내 나이도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건만, 철이 덜 든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내 안에는 여전히 8090 대중음악을 즐겨 듣는 레트로 한 취향과 소녀 감성(?)이 넘친다. 그래서일까? 유지태, 이보영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만들어 내는 탄탄한 스토리뿐 아니라 1990년대와 현재를 넘나 드는 아련한 배경들은 내게 잊고 있던 많은 추억과 장면들을 소환시켰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뜻한다. 이 작품 역시 이미 가정을 이룬 두 남녀의 과거 20대 시절, 눈부시게 빛나고도 시릴 만큼 애틋한 첫사랑을 그렸다. 사실상 떳떳할 수만은 없는 불륜이지만 전후 사정을 이해한다면 누구도 재현과 지수를 향해 함부로 욕하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사랑이라면, 그런 그리움이라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으니까.


내 생각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보다 그리움을 표현하는 게 지독하리만치 더 어려운 것 같다. 사랑은 말이나 편지로도 전달할 수 있겠지만, 어떤 그리움은 마치 용암처럼 가슴 깊이 묻어둔 눈물을 한바탕 토해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것만 같은 오랜 편지들을 읽다가도, 작은 테두리 안에 박제되어 있는 사진을 보더라도, 서울 곳곳마다 도처에 널려 있는 추억들을 지워낼 방법이 없어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몇 해가 있었다.


우리 이제 끝냈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지나도 예전이 아쉽고 그리운 거 우리가 제대로 헤어진 적이 없어서 인 것 같아요
_지수


그와 내가 십 년이 넘도록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미지근한 관계를 질질 끌어왔던 것도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헤어진 적이 없어서인 것도 같다. 늘 뭔가 애매하게 여지를 남겨두거나 헤어진 것도 사귀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관계. 어쨌든 결국 '헤어지자'는 말로 끝을 내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애틋하고 그리웠던 것들이 하나둘 거짓말처럼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에 나는 아마도 조금은 지독한 꿈을 꾸었던가 보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같은 선택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경험도 지혜도 부족했기에 여러 가지로 미숙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 아주 가끔은 소중한 보석상자를 들여다보듯 나의 20대를 그렇게 그리워하고 추억하련다.


이 드라마를 통해 레트로 한 감성이 묻어나는 추억의 장소나 공중전화, 삐삐 등 그 시절 누렸던 소소한 것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청년시절 지수와 재현이 각자 영화를 보고 나와 마주치는 종로 《서울극장》이 작년에 42년 만에 폐관했다는 것도 그 장면을 보고 생각이 나서 찾아보다가 알게 됐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학창 시절 친구 성아와 둘이서 지하철을 타고 종로로 향하다가 객차에서 나만 하차하고 친구는 내리지 못한 바람에 서로 코미디 단막극 한 편 찍고, 《서울극장》 앞에서 마주했을 때 눈물이 나도록 반가운 마음에 서로 얼싸안고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던.. 문명의 혜택을 덜 누리던 때라 생활은 지금보다 불편했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이야기추억을 만들며 돈독해질 수 있었던 그 시절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PeXQces10

당시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평범한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꽃처럼 아름답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그 자체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닐까? 지금은 비록 그 끝에 가보지 않아서 하나하나 꽃인 줄 모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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