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Concerto No.1,Ⅱ.Romance _F. Chopin
연간 교육과정 중 제일 중요하고도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예울림제 음악과 연주회를 성황리에 잘 마무리했다. 학과 부장으로서 3월 학기 시작할 때부터 걱정, 일정을 두어 달 뒤로 미뤄 놓고도 걱정, 방학 때 먼 길 여행지에서도 예울림제만 떠올리면 노심조차 걱정이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우리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 모두가 합심으로 도와줘서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어찌 되든 11월 24일은 지나갈 거라 일정 마치고 귀가하면 조용히 뒤풀이나 하려고 와인을 한 병 사둔 게 있었는데 엊그제 퇴근길에 차가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고 피로감에 씻기만 하고 바로 자느라 와인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지난여름, 코로나 이후 약 4년 만에 멀리 여행을 가느라 2주 동안 차를 그냥 세워둔 게 화근이었다. 이후 시동을 켤 때마다 시름시름 앓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턴 아침 출근길에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번번이 애를 태웠다. 8년 전 차를 사고 그간 한 번도 배터리를 교체한 적이 없었으니 참 오래 버텨준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됐든 차에 문제가 생기는 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참 번거로운 일이다. 하필이면 날씨가 갑자기 영하로 내려간 데다 공연장까지 아이들을 인솔해서 가느라 학교 주차장에 종일 차를 너무 오래 세워둔 탓인 듯 이번에는 시동은커녕 브레이크도 밟히지 않았다. 결국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긴급 출동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내 차의 배터리를 임시 충전해 줄 기사님은 그로부터 약 20여 분 뒤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다시 학교로 들어가 교무실에 있다가 나오기도 참 애매한 시간.. 그래도 지난번에 출장 다녀오다가 차에 기름이 바닥 나서 국도 한가운데 불 꺼진 주유소에서 혼자 긴급 출동 기사님을 기다릴 때보단 나은 상황이었다. 여긴 안전한 우리 학교 주차장이니까. 원래 차를 운전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생기는 법이라 서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영하의 날씨에 혼자 차 안에 있으려니 너무 춥고 지루했다. 젠장, 이럴 때 남편이란 존재가 필요한 건가 보구나.
출동 기사님한테 전화가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누구랑 전화통 붙들고 수다 떨 상황도 아니었고 차 안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듣는 것뿐이었다. 때마침 애청하는 클래식 FM 「당신의 밤과 음악」에서 조성진 협연으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Op.11 - 2. Romanc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니..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49)은 약 200곡의 유작 중 170곡 이상이 피아노곡일 만큼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이다. 연습곡, 소나타, 즉흥곡, 야상곡, 왈츠를 비롯하여 폴란드의 춤곡인 폴로네이즈와 마주르카 등 여러 작품들을 썼고, 피아노 협주곡도 두 작품이 남아있지만 교향곡이나 오페라는 단 한 개도 작곡하지 않았다. 쇼팽이 스무 살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1번 Op.11 마단조는 본래 2번보다 1년쯤 늦게 작곡되었지만 악보 출판을 먼저 했기 때문에 번호가 바뀌게 되었다. 쇼팽은 1930년 10월 11일,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기 전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극장에서 이 작품을 마지막 고별 연주로 연주했고, 이후 평생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2악장 로망스 Romance는 쇼팽이 음대 시절 짝사항했던 여학생에 대한 갈망이 담긴 곡으로 1830년 5월 15일,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2악장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이 새로운 협주곡의 아다지오는 e단조라네. 여기서 나는 강렬한 힘을 추구하지 않았어. 로맨틱하고 평화로운 기분에 젖어 약간의 우울함을 느끼면서, 많은 추억들을 되살리는 장소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담아내려고 했지. 아름다운 봄의 달빛이 어린 밤처럼 말이야”
갓 스무 살 청년의 치기 어린 로맨스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매우 예리하고 섬세한 감성 없이는 이 곡이 지닌 아름다움을 온전히 살릴 수 없을 것 같다. 잔잔하면서도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이 작품은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거머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결선에서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몇 년 전 실연으로 조성진의 연주를 감상했을 때 건반 위를 오르내리는 그의 손끝에서 투명한 크리스털 조각들이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시동이 켜지지 않는 차 안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시트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듣는 쇼팽의 로망스는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주었다. 추위와 피로감에 꽁꽁 얼어붙은 내 몸과 마음을 낭만적이면서도 달콤하게 녹여주었으니 그는 가히 피아노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