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4악장
아끼는 손목시계를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다. 코로나19 시국에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을 때마다 시계를 풀어두는 습관 때문이다. 방수 시계가 아니어서 오래오래 아껴서 잘 쓰려는 마음이었는데 아예 못 보게 되었다니.. 언젠가 한 번은 막 외출하려는 참에 휴대폰을 찾는데 도통 보이질 않는 거다. 친한 동생하고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대략 몇 초쯤 걸렸다(부끄럽지만 실제 사건임). 집 현관문을 비롯해서 각종 웹사이트의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걸 보면 분명 치매를 아닌데 언젠가부터는 직장에서 또 그렇게 칫솔·치약을 놓고 다닌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이를 닦고 왔다가 나중에 가보면 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는 내 양치컵. 근데 신경을 써야지 하고 마음을 먹은 얼마 전부터는 놓고 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요새는 잊고 오는 일이 아예 없다. '신경을 써야지' 하고 마음을 먹은 그 근육이 점점 강화되면서 매번 양치컵을 챙겨서 오는 게 자동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클래식 작곡가들 중에서도 건망증이 심했던 인물이 있다. 베토벤은 자주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편지나 원고를 자주 분실하곤 했으며 작곡 도중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면 외출 중에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노트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어서 원래 가려던 목적지를 곧잘 잊어버리기도 했다. 또 다른 일화로 베토벤이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의 한 극장에서 자신이 새로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 서자 자신이 연주자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열정적으로 지휘를 해 청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또 베토벤은 산책을 나갔다가 저고리를 벗어놓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면도하려던 것을 깜빡 잊고 얼굴에 비누칠을 한 채 친구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작곡가들 중에서 슈베르트도 건망증이 심했다고 알려졌는데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으며 '누가 작곡했는지 참 아름다운 곡'이라고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을 했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cmy-daxIZk
망각이나 건망증이 인지능력의 결함이 아니라 뛰어난 지적 능력의 증거일 수도 있다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주석 첨가] 사소한 물건들을 깜박하고 자주 잊어버리긴 해도 소중한 결혼반지나 추억이 담긴 기념품 등을 아무 데나 놓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간의 뇌는 분명 그 둘을 구분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인류에 수많은 음악 유산을 남긴 베토벤, 슈베르트도 인간적인 면모에 있어서는 어딘가 의외로 허술한 빈틈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악상과 작곡에 대한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파는 것은 위험이 따를 수 있다. 얕지만 다양한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는 게 예측불가한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베토벤의 음악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쉼 없는 감동과 이 혼란스런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