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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테의 꽃 Jun 23. 2024

거울 속의 거울

Arvo Pärt _Spiegel im Spiegel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들이 누군가에 대해 더 많은 인상과 정보를 제공한다. 오래전 신촌 명물거리의 어느 골목길을 걷다가 찢어질 듯한 경적 소리에 놀라 화들짝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순식간에 내 옆을 지나 멀리 사라져 버린 자가용 한 대.. 대로변도 아니고 골목길 인도를 걷고 있는 행인의 바로 뒤에서 그토록이나 날카로운 경적으로 짜증과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그 사람이 궁금했다. 단단한 고철 프레임 속에 자신의 실체를 감춰 두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는 공격성과 무례함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언젠가 또 한 번은 지리에 익숙지 않은 곳을 찾았다가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막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아직 운전이 많이 서툴던 때라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의 대열에 끼어들질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수십 대의 차들이 지나가는 동안 어느 누구 하나 틈을 양보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때 차량 한 대가 슬며시 다가와 멈춰 서더니 자기 앞의 자리를 내게 내주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차에서 내려 뒤차량으로 다가가 꾸벅 인사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뒤차량의 운전자, 그 사람이 몹시 궁금해졌다. 얼굴이나 성별, 나이를 비롯해서 그에 대해 무엇 하나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가 내게 남긴 배려와 품격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박제된 채 남아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만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주름이라도 짜증을 내다가 생긴 주름과 웃느라 생긴 주름은 얼굴에 전혀 다른 인상을 새긴다지 않던가? 머리카락은 점점 더 하얗게 새고 눈빛은 흐릿해지겠지만 분명 맑은 꼴을 간직했을 그때, 그 사람을 닮고 싶다.


결국엔 모든 것이 죽지 않는가, Doesn't everything die at last,
그것도 너무 일찍? and too soon?
말해 보라,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Tell me, what is it you plan to do
당신의 하나뿐인 With your one
이 야생의 소중한 삶을 걸고 wild and precious life?
당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 Mary Oliver, 『여름날』중에서

https://youtu.be/n37bNmVggtU

Arvo Pärt _Spiegel im Spiegel (Renaud Capuçon with pianist Guillaume Bellom)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브로 패르트(1935. 9. 11.~ )의 '거울 속의 거울 Spiegel im Spiegel'은 두 개의 거울이 서로를 반사하며 무한히 반복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패르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으로 미니멀 음악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지만, 단순함 속에 내포된 명상적인 분위기가 내면의 성찰과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피아노 반주부의 반복적인 패턴은 삶의 순환과 영속성을, 현악기의 선율은 시인 메리 올리버 Mary Oliver가 『여름날』에서 '말해 봐, 당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라고 던진 물음처럼 삶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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