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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테의 꽃 Jun 30. 2024

나의 배로 항해하는 법

Symphony No.9 Mov.2 _A. Dvořák

입시를 앞둔 고3 시절 레슨과 연습 내용을 기록하고 되새길 용도로 8절 스케치북을 사서 원하는 크기로 직접 달력을 그려 만든 적이 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기록하는 행위는 습관으로 굳어졌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이어리에 일상을 새긴 지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물론 문장으로 완성하는 진짜 일기다운 일기는 종종 비공개 블로그나 노트에 적어두곤 하지만 내가 누굴 만나고 어디에 갔으며 무엇을 했는지와 같은 주요한 일정들은 매일 다이어리에 남겨두기 때문에 클릭 한 번이면 20여 년 전 오늘 하루를 어렴풋이나마 복기하는 게 가능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갔을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우리나라에 비해 인터넷 속도가 훨씬 느리고 답답하던 때라 스케치북보다 약간 작은 사이즈의 달력을 준비해 가서 수기로 일정을 기록해 두곤 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엔 국내에 벤처 바람이 불면서 다양한 커뮤니티와 광고를 무기로 한 웹사이트들이 많이 생겨나던 때였다. 동생이 주로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포털 사이트를 하나 알려 주었는데 가계부, 일정, 게시판, 커뮤니티 등이 알차게 갖춰진 데다 회원가입만 하면 무료로 이용이 가능해서 정말 유용했다. 하루에 한 번씩 이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날 발생한 지출입이나 시간대별 일정, 중요한 메모 등을 남겨두는 게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습관이 무서운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무의식의 자동화가 이루어진다는 거다. 십수 년 동안 매일 출근 도장을 찍듯 꼭 한 번씩 접속해서 나의 하루를 기록하던 해당 사이트는 몇 년 전 운영난으로 잠정 폐쇄되었다. 몇 개월 전부터 알림창을 띄우고 모든 기록들을 엑셀 파일로 저장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준 덕분에 그 많은 기록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챙길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은 엑셀과 많이 유사한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이용해서 개인 일정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렇게 엑셀이나 캘린더에 남겨둔 기록들은 '날짜 설정'이나 '찾기'와 같은 기능을 통해 과거 특정한 날의 기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이 6월 29일이니 저장해 둔 파일만 열어보면 지난 25년 동안 매 6월 29일마다 내가 뭘 했는지 대충 소환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그야말로 실존하지 않는 타임머신이 따로 없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다이어리를 쓸 때 과거의 같은 날짜들을 검색해 보고는 했다. 그야말로 위인들의 역사 연표처럼 살아있는 내 연표를 훑을 수 있는 기회인 거다. 그 속에는 울고 웃고 넘어지고 다시 도전했던 나의 청춘을 비롯해서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친구나 지인들부터 소중한 나의 부모님, 동생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0년 뒤 6월 29일에도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록들을 들춰 볼 테지?


I am not afraid of storms, for I am learning how to sail my ship.
나는 폭풍이 두렵지 않다. 나의 배로 항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 Louisa May Alcott -


인생이란 문제에 있어 과거는 이미 내가 찍은 답을 알고 있기에 실망스럽더라도 겸허히 결과를 인정할 수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내가 찍은 답이 옳은 답인지 심지어 어떤 답을 선택할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불안이 혼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오랜 시간 꾸준히 다이어리에 일상을 기록하면서 이미 지나가 버린 수많은 나날들을 마주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너무 먼 미래까지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작년 6월 29일보다 오늘 6월 29일이 크게 불행하지만 않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오늘이라는 거! 과거의 숱한 나날들을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날들도 있지만 실망과 자괴감이 들 정도로 속상하고 부끄러운 때도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말았어야 됐는데 그런 도전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고 그런 모욕을 당했을 땐 최소한 정색이라도 했어야지 등등 무슨 회한이 그렇게나 많은지. 하지만 모난 돌이 파도에 깎이고 깎여 둥글고 단단한 몽돌이 되듯 좋은 날, 힘들었던 날 모두 지금의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습관 때문에 종종 나를 힘들게 한다면 꾸준히 일기나 다이어리 쓰는 걸 추천하고 싶다. 규칙적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내가 비교할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지나가 버린 어제, 1년 전 오늘, 과거의 내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https://youtu.be/rCxErKvSMTY

A. Dvořák: Symphony No.9 Mov.2 'From the new world' _Gustavo Dudamel, Berliner Philharmoniker

일기를 자주 쓴 작곡가 중에 안토닌 드보르작 Antonin Dvorak가 있다. 드보르작은 1898년 미국 아이오와의 스필빌에 머물며 일기를 썼으며, 이는 그의 미국 생활과 창작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에는 그의 미국 생활과 그가 받은 음악적 영감이 잘 담겨 있다. 또한 드보르작이 어떻게 미국의 원주민 음악과 흑인 영가에서 영감을 받아 <신세계 교향곡 From the new world>을 작곡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드보르작은 1892년부터 1895년까지 뉴욕에서 음악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이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는 미국의 민속음악,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와 인디언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러한 요소들을 자신의 교향곡에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는 미국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자신의 슬래브(체코) 민속음악 요소를 교향곡에 녹여냈다. 이는 드보르작이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1893년 12월 16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카네기 홀에서 초연된 이 교향곡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드보르작의 일기과 편지에는 초연에 대한 그의 기대와 긴장 그리고 성공적인 초연 후의 기쁨이 잘 드러나 있다. / 관련 자료나 문헌 추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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