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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7 FRI : 붓의 감각

by 윤소

새하얀 캔버스에 붓을 처음으로 갖다 대는 순간, 그 순간에 느낌이 온다. 이 그림은 잘 될 것인가, 아닐 것인가. 상당히 점쟁이스러운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나는 대부분의 스케치를 붓으로 시작하는데, 이 스케치에 따라서 그림의 운명이 달라진다. 스케치에서 구도, 색감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정해진다.

나의 지도교수님도 실제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붓질의 느낌이 좋지 않을 때는 계속하지 말고 얼른 주위를 점검해 보라고. 이 말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언제나 컨디션이 좋지만은 않듯 붓 끝으로 느껴지는 감각도 매번 다르다. 한 번에 쓱 잘 그려지는 날도 있고,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게 그려지는 날도 있다. 붓의 움직임이 뻣뻣하다고 느껴질 때면 나는 더하기를 멈추고 스케치를 지워 버린다.

나는 붓질이 단순히 선을 그려내거나 면을 메우기 위한 용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붓질은 선을 그려내는 동시에 면을 차지한다. 또한 붓질은 작가의 필력과 움직임을 담아낸다. 따라서 페인팅에는 작가의 몸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나는 페인팅을 감상할 때 붓질을 많이 들여다보는 편이다.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붓을 지나갔는지를 살피다 보면 놓치기 쉬운 깨알 포인트를 마주하기도 한다.

나의 붓질과 그림에도 나만의 움직임이 있다. 나는 주로 유화의 유동적 성질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려 나간다. 나의 붓질은 캔버스 위에서 서로 섞이기도, 밀어내기도 한다. 이 성질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나는 그림을 단 한 번의 레이어 안에서 끝내려고 한다. 누군가 나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아웃라인의 미세한 차이와 색의 섞임을 봐달라 말하고 싶다.

나만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만 그림을 그려!’하고 단정 지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움직임을 간직한 채, 지금보다 더 나은 작품을 해나가고 싶다. 붓이 캔버스 위에 닿아 지나가는 그 순간과 느낌은 앞으로도 사랑스러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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