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Sep 20. 2020

<추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등감

<추석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열등감

 

역사, 과거, 추억에 관한 글을 쓰다 보면, ‘이게 아니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단단히 맘을 먹고, 책상에 앉으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역사는 일부라도 자명하지만, 미래는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미래보다는 안다고 착각하는 과거를 쓰는 것이 맘 편하다. 역사를 모르면 위키피디아라도 찾아보지만, 모르는 미래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점쟁이를 찾아가야 한다. 전자는 훌륭한데 공짜지만, 후자는 엉터리인데 되려 비싸고 번잡하다. 그래서 미래를 기획한 글은 늘 추억으로 시작해 과거에 머물고 끝난다.


그러나 추석이니까! 추억 한 토막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대학시절에 과사무실이나 동아리방에 가면 모두가 쓰고 보는 잡기장 같은 것이 있었다. 정치 이야기에서 개인적 고민까지 다방면으로 쓰지 못할 것이 없는 그런 노트였다. 서클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는 선배들도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 와서는 잡기장을 읽다가 도서관으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 서클의 잡기장 이름은 ‘아람지’였던가? 아람지에 사랑 고백을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치적으로 날 선 공방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정성스레 이야기를 쓰기도 했고 좋은 글이라는 칭찬도 간혹 받았다. 몇몇 글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다시 써보라고 해도 쓸 수 있을 듯하다.

간혹 동아리 활동에 소홀한 선배나 후배가 휘갈기듯이 글을 써 놓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어쩜 그리도 글을 잘 쓰는지 글솜씨에 감탄할 때가 있었다. 그런 글은 내 열등감을 자극했다. ‘그래! 글은 잘 쓰지만 생각이 삐딱하군!’이라고 생각하면 맘이 편해지곤 했다. 그럴 때 쓰라고 우리말에는 참 좋은 단어가 있다. 알량함. ‘그런 알량한 글재주로 뭘 하겠다는 것인가?’ 알량하긴 다 마찬가지인데, 남의 글은 알량하고, 내 글은 안 알량해야만 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은 내게는 그런 알량한 글이었다. 그런데 그 칼럼을 쓴 사람은 공교롭게도 내가 다닌 학교와 학과의 교수를 하고 있었다. 순간 자존심이 상하고 열등감이 증폭되어 하체는 쪼그라들고 상체는 부풀어 올라 해리 포터 이모처럼 하늘로 허우적거리며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는 대학 교수 자체가 알량한 직업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고, 하버드 너마저… 하버드 박사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그런 약자 코스프레나 하고 나이도 어린 X이 알량하게…

그간에 안 읽는 척하면서 칼럼을 틈틈이 읽어 왔다. 무릎을 칠만한 비유가 있었다. 그런 글을 많이 읽으면 나도 비유의 달인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이번에 책을 사봤다. <공부란 무엇인가?> ‘방광에 액체가 가득해도 갈증해소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표현을 배웠다. 오줌을 자주 참는 나에게는 아주 몸으로 와 닿는 비유였다. 그러나 독자가 대학생 중심이어서 그런지 큰 인상은 받지 못했다. 기생충 박사 서민이랑 뭐 다른 것도 없는 재치구만! ‘달인을 만나다’의 김병만 같은 유머구만!


난생 처음으로 책을 읽고 리뷰도 남겼다. 3점. 아! 알량하다. ‘그래서 넌 안돼!’라고 말하는 와이프의 질책이 또 한 번 들리는 것 같다. 와이프에겐 비밀로 해야겠다. 귀에 못이 박혀 있는 말을 한번 더 듣게 된다면, 못 끝이 고막을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껏해야 2점을 줄 수 있는 대부분의 책보다는 나은 것 아니냐?’는 말로 서평을 마무리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고마움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표현해야했기 때문이다. 이 저렴한 열등감이라니.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이 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나는 추석에 만나는 친인척과의 만남을 어릴 적부터 좋아했기 때문이다. 용돈도 받고, 칭찬도 받는 추석은 쉬는 날이 되면 안 되었다. 추석에 쉬고 싶다는 말을 와이프가 했을 때, ‘추석이 우리 쉬라고 있는 날이냐?’는 말을 한적도 있는 내게는 모든게 맘에 들지 않는 칼럼이었다. 평소에 쉬면 된다. 그리고 추석날은 조상도 만나고, 부모님도 만나고, 친척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자!

올 해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따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말이다. 다음 설날에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설날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조카와 삼촌, 조카와 이모가 설전을 벌이는 그런 명절을 기대해 본다.

런던에서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추석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이 더 많다. 추석이 한 참 지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추석날 뜨는 달은 런던에서도 고향만큼 큼지막하다.

아! 그런데 <공부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나보다 제법 나이가 많다. 주례를 서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유는 결혼식에 가면 자꾸 신랑과 주례를 혼동해서 곤란하기 때문이란다. 얼굴까지 동안인 모양이다. 알량하게...



작가의 이전글 가장 오래된 성경과 브리티시 라이브러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