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프
보랏이 이런 영화였어?
보랏이 왜 훌륭한 영화인 줄 알겠다. 카자흐스탄 사람 보랏이 미국에서 겪는 좌충우돌을 다루는 보랏 1을 2006년에 보았다. 그때는 이게 도대체 무슨 영화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97년부터 99년까지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카자흐스탄에 있었다. 내가 아는 카자흐스탄과 너무 달랐기에 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후로 2007년에서 2017년까지 카자흐스탄에서 살았다. 살면서 카자흐스탄에 대한 책 ‘유라시아 골든 허브’를 출간했고, ‘두마디 카자흐어’라는 책을 집필 완료했지만 출간은 하지 않았다. 오늘 보랏 2를 보았다. 마침내 영화의 작가이자 주인공인 사샤 노암 배런 코헨(Sacha Noam Baron Cohen)이 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깨달았다.
이 영화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나오는 곳은 카자흐스탄이 아니며, 심지어 비슷하지도 않다. 영화 속의 카자흐스탄 언어는 카자흐스탄 말이 아니다.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오히려 러시아어는 몇차례 나온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카자흐스탄이 저런 나라냐?’고 물을 필요도 없고, 카자흐스탄 정부가 보랏 영화를 두고 불평할 이유도 없다.
영화 속의 언어는 폴란드어가 섞인 히브리어다. 폴란드 지역에 살았던 아쉬케나지 유대인의 언어다. 주인공인 사샤 코헨은 아쉬케나지 유대인인 부모에게 태어나 런던에서 유대인으로 자랐으며,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는 런던 북부의 명문 사립학교인 하버다쉬 스쿨을 졸업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컬리지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보랏은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인물일 것이며, 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주인공와 조연이 보여주는 여성과 딸을 대하는 태도, 역사를 다루는 시각, 유대인과 집시를 대하는 태도, 낙태를 보는 시각, 중국을 대하는 태도, 바이러스와 백신을 대하는 태도, 미국 정치를 보는 시각 등등은 하나같이 불편하다.
그러한 불편함의 총아인 보랏은 웃긴 놈이나 이상한 놈이 아니라 미친놈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중에 보랏이 가지고 있는 편견 중의 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그림자와 조금이라도 중첩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도 세상의 많은 저열한 편견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소름이 돋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결국 관객 중에 많은 수는 살면서 아주 소수에게라도 어느 짧은 순간이라도 보랏이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 중 어떤 이는 어딘가에서 피의 댄스를 추었던 적이 있다. 그런 피의 댄스가 얼마나 당혹스럽고 껄적지근했으며, 불편하고 웃긴지 보여 주는 영화다.
홀로코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기쁨의 춤을 추는 주인공은 카자흐스탄인 보랏일 수가 없고, 유대인 코헨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약자에게 잔인했으며, 약자를 악마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 의미에서 이 영화는 카자흐스탄의 외피를 썼지만, 실제는 유대인의 유머로 점철된 유대인의 영화다.
보랏이 보여주었던 수많은 기행과 편견에 조금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다면, 그 관객은 매우 기뻐할 일이다. 죄 덜 짓고, 남들에게 모진 짓 안 하고 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 경우 이 영화를 그저 코미디로 보고 요절복통 웃으면 그만이다. 다만 그런 사람의 경우 너무 순수해서 이 영화가 진짜 카자흐스탄 사람을 다룬 것이라고 오해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주인공인 유대인 사샤 노암 배런 코헨은 유발 하라리 못지않은 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