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프
지금은 영국에 입국할 때 출입국 관리 직원을 만나지 않고 여권만 스캔한다. 영국에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자동 입국대가 아니고 대면 창구를 이용해 보기를 권한다. 말없이 도장을 찍어 주려고 한다면, 먼저 말을 걸어 보는 것도 좋다. 아무 말이나 걸고, 그들의 대응을 살필 수 있다. ‘왜 입국하는 거야? 얼마나 머물 거야?’라는 건조한 질문 대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위아래로 훑어보는지를 눈여겨 볼만하다. 출입국 관리자가 입국자를 대하는 태도가 그 나라가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라고 이해하면 된다.
출장을 다녀오면서 게트윅 공학을 통과할 때 일이다. 입국 카드와 여권을 이리저리 자세히 보더니 ‘이제 카자흐스탄에서 안 살고, 런던에서 사는 거야? 런던이 맘에 들어?’라고 물어보았다. ‘런던은 세계 최고 도시잖아’라고 말하자, ‘도버를 안 가봤구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오늘 도버에 왔다.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 도시 도버(Dover)와 프랑스 도시 칼레(Calais)가 마주 보고 있다. 도버에서 칼레까지의 거리는 33km다. 이게 얼마나 짧냐면, 울릉도와 독도 거리의 1/4도 채 되지 않는다. 영국과 프랑스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른 한편으로는 33km의 해협이 영국을 보호해 주는 요새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칼레에서 도버로 대포를 쏘면 날아와 닿을 것만 같다. 실제로 2차 대전 때 독일군에는 사정거리 48km인 대포가 있었다. 유럽 최강의 나폴레옹 군대가 도버 해협을 건너지 못했으며, 지상군과 공군 전력에서 앞섰던 히틀러 군대도 해협을 건너지 못했다. 영국을 지킨 것은 짧은 폭의 도버 해협이 아니라 막강한 해군력이었던 셈이다.
인류는 6천년 전에 이미 도버 해협을 건너 다녔으며, AD 43년에 로마군이 도버에 도착했다. 도착하여 도버 캐슬 자리에 세운 등대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정복자 윌리엄이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현재와 같은 형태의 캐슬이 세워졌다. 도버 캐슬 지하에는 2차 대전 때 작전 본부로 사용한 터널이 있다. 관광객은 터널을 지나면서 터널을 따라 흐르는 덩커크 다큐멘터리 필름을 시청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들고, 상영하는 기술은 영국이 최고다. 지하 터널을 걸으면서 볼 수 있도록 터널을 따라 흐르도록 만든 다큐멘터리라니!
화이트 클리프에 서 있으면 주변의 모든 색이 참으로 이쁘다. 절벽 위의 녹색 잔디, 하얀색 절벽, 파스텔 빛의 바다, 회색 구름, 무색의 바람과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자식을 유럽의 전쟁터에 보낸 부모가 하얀 절벽에서 대륙을 바라보았다면, 이런 색과 빛 때문에 더욱 슬펐을 것이다. 절벽의 지하에 처칠과 램지가 있었고, 영점이 안 잡힌 독일 포탄이 가끔씩 랜덤 하게 떨어지고 있었다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