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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Nov 10. 2020

케네디 가문은 울지 않는다

런던 라이프

케네디 가문은 울지 않는다(Kennedys don’t cry)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부계와 모계가 모두 아일랜드 계통인 순종(?) 아일랜드 후손이다. 종교도 카톨릭이다. 아일랜드는 환호했다. 아일랜드는 인구가 7백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자신이 아이랜드계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33백만 명이나 된다. 잉글랜드계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미국인이 22백만 명인 것에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다. 거기에 더해 스코트랜드-아일랜드계(Scotish-Irish)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이 별도로 있다.

IMF 기준으로 아일랜드의 일인당 GDP는 80 000달러로 노르웨이보다 높다. 영국의 40 000달러보다 두배가 높다. 불쌍한 역사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아일랜드가 그렇게 잘 산다고? 누구나 깜짝 놀랄 데이터다. 영국에게 맨날 쥐어 터지고 살아서 맥그리거 같은 싸움꾼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실제로 아이들 학교에서 보면 잉글랜드 학생과 아일랜드 학생의 신경전이 가장 치열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일랜드가 실제로 그렇게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많은 미국 기업이 유럽 본부를 아일랜드에 두고 있다. 그래서 국내 총생산이 많이 잡히고, 적은 인구수로 그걸 나누니까 일인당 국민소득이 높게 나온다. 미국 기업이 유럽 본부를 아일랜드에 두는 이유는 아일랜드가 세금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친 아일랜드 성향도 조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앞으로 아일랜드에 여러 가지 좋은 일이 더 생길 것이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택하면서 영국 대비 아일랜드의 비교 우위가 미국 기업에게는 두드러질 것이다. 미국인의 아일랜드 러시가 시작된 것은 케네디 대통령 때다. 존 케네디도 조 바이든과 마찬가지로 부계와 모계 모두 아일랜드 계통인 순종(?) 아일랜드 후손이다.



존 F. 케네디의 부모님은 9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네번째 딸인 캐틀린 케네디가 제일 먼저 결혼했다. 캐틀린이 영국의 귀족인 데본셔 공작 윌리암 카벤디쉬와 결혼할 때, 케네디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결혼시킬 수 없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카톨릭과 결혼해야 했다. 곧 아일랜드 계 미국인 또는 아일랜드인과 결혼해야 했다. 케네디 집안은 그만큼 아일랜드와 카톨릭 전통을 중시했다. 캐틀린의 오빠며, 미국 35대 대통령이 된 존은 그로부터 한 참 후에 결혼했는데 재클린 역시 카톨릭 신자였다. 재클린의 어머니가 아일랜드 계였기에 카톨릭 신자로 자랐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고, 초대 SEC(증권거래위원회) 의장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친분이 깊었고, 2차 대전 발발 당시에 영국 주재 미국 대사였다. 케네디 가족 모두 런던에 살면서 런던 라이프에 심취했다. 존 케네디는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공부했고, 영국의 상류층과 폭넓게 교류했다. 캐틀린 케네디는 영국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그녀는 창백한 영국 장미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해바라기였다고 한다. 그게 뭘까?


캐틀린 케네디와 데본셔 공작 윌리엄


케틀린이 결혼할 때, 어머니는 ‘아일랜드 카톨릭 교인이 교회 밖에서 결혼할 수 없으며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고 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쓴 결혼식에는 큰 오빠인 조 케네디만 참여했다. 조는 동생의 결혼식 한 달 후에 2차 대전 작전 중에 전사했고, 케틀린의 남편은 4개월 후에 독일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죄를 짓고 지옥에 간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오르는 절망에 빠졌지만, 케틀린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근데 규칙이 있어. 케네디가는 울지 않아.(But the rule is. Kennedys don’t cry.)’

비극을 당한 4년 후인 1948년에 다른 영국인과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의 승낙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가던 중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영국의 더비셔에 묻혔다.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임기를 시작한 1961년에 영국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났지만, 아일랜드를 방문하지 않아 아일랜드를 충격에 빠트렸다. 결국 이년 후인 1963년에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이 방문으로 미국인의 아일랜드 방문이 러시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아일랜드와 미국의 교역량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아일랜드를 방문한 케네디는 영국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하여 여동생 캐틀린이 잠든 무덤을 참배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암살당했다. 존 F.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어린 아들은 울지 않고 거수경례로 아버지를 배웅했다. 이 장면을 통해 ‘케네디가는 울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전 세계에 전달되었다.



케네디가 당선되고 60년 만에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일랜드는 다시 환호했다. 케네디를 통해 아일랜드와 미국의 관계가 강화된 것처럼, 양국 간의 관계가 또 한 번 도약하기를 기대한다.

‘케네디가는 울지 않는다’는 문장에서 케네디가 대신에 어떠한 말을 넣어도 멋지다. 아일랜드는 울지 않는다. 캔디는 울지 않는다. 그런데 캔디도 영국에 와서 테리우스라는 영국 공작의 아들을 만난다. 캐틀린이 캔디일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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