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프
크리스마스, 가족 그리고 축구
크리스마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영국에 와보고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하철과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일을 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업계 종사자도 크리스마스를 즐겨야 하기 때문이며, 시민들은 시내를 돌아 다니기보다 가족과 함께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 모이는 크리스마스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추석에 가장 가깝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과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도 지난 추석에 부모님을 뵈러 가지 말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 시대의 효자와 효녀는 고민이었다. ‘가느냐 가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다섯 자녀가 모두 모여 김장을 담그면서 엄마에게 동네 사정을 물어보았다. 우리 동네 자녀들은 대부분 추석에 다녀 갔다고 했다. 그리고 시골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같이 바이러스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찾아오기를 바랐다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영국의 크리스마스도 딜레마에 빠졌다. 아이들 학교가 학사 일정보다 이틀 일찍 방학을 시작한 곳이 있었다. 10일 날 방학을 시작하여 14일간 집에 있고, 24일에는 할머니 집에 갈 수 있게 한 조치였다. 예정대로 13일에 방학을 시작한 학교는 증상이 있거나 유증상자와 접촉한 학생에게 14일 격리가 아닌 10일 격리를 요청했다. 모두 24일에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한 조치였다.
12월 들어 영국 정부는 방역 조치를 강화했다. 그러나 국민의 1/4이 ‘크리스마스 때에 정부의 방역조치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고, 정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고 싶지 않다’고 화답했다. 정부는 크리스마스 플랜을 나름 정교하게 짰다. 23일부터 27일까지는 세 가정까지 만날 수 있도록 했고, 만나는 인원을 제한하지 않았다. 가족을 만나기 전에는 5일 이상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도록 권유했고, 연로한 부모님이 계실 경우 백신 접종 이후로 만남을 미룰 것을 고려하라고 부탁했다. 영국의 효자와 효녀는 고민했다. ‘보느냐 보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빠르고, 변종 바이러스가 런던 남동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정부는 예외조치가 25일 하루만 적용된다고 수정 발표했다. 햄릿식 고민에 정부식 답을 제시한 것이다. 가족 간의 파티는 정부의 권고를 따르지 않을 것이지만, 다른 형태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영향을 받을 것이다. 26일로 예정된 우리 동네 크리스마스 파트도 연기되었다.
축구 선수들이 시즌 초에 일정이 나오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박싱데이(Boxing day) 경기 스케줄이다. 원정 경기가 잡히면 크리스마스 날을 호텔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EPL 사무국은 박싱데이에 어느 팀도 멀리 원정을 가지 않도록 스케줄을 짜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호텔에 머무는 원정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도 먼 원정을 피하게 일정을 짜기 때문에 박싱 데이 경기는 지역 라이벌 팀끼리 맞붙는 경우가 많다. 라이벌 팀과의 경기를 온 가족이 모여서 보기 때문에 박싱데이는 무척 중요하다.
버스와 지하철도 운행을 하지 않는 마당에 축구선수들은 25일에 연습장에 나와 연습을 할까? 박싱데이 경기를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연습을 한다. 홈경기가 있는 팀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겠지만, 원정팀의 경우 호텔에서 동료들과 같이 저녁을 먹는다.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지만, 칠면조에 포크를 대거나 샴페인을 입에 대는 경우는 드물다. 주로 브로콜리만 먹는다고 한다. 온 가족이 모여 축구를 보는 박싱데이 때에 골을 넣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물론 출전 가능성이 낮은 후보선수라면 칠면조의 주요 부위를 큼지막하게 잘라서 먹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칠면조 한 마리에 100파운드 정도 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3월 말 춘분을 나우르스라고 하여 크게 기린다. 그때는 가족끼리 모여 양을 잡는데, 양 한 마리 가격이 보통 100파운드 했던 기억이 난다. 칠면조든 양이든 통째로 한 마리를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가족이 모인다는 것은 소중하지만, 칠면조와 양 앞에서 그것은 왠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보느냐 보지 않느냐? 그것이 참 힘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