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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Feb 21. 2021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상속 제도

London Life 2.0

London Life 2.0

(2)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상속 제도
  
  
얼(Earl, 백작)이나 배론(Baron, 남작)과 같은 귀족 작위는 왕의 자리처럼 장자에게 상속된다. 이를 프라이모제니처(primogeniture)라고 한다. 왕 타이틀은 아들이 없을 경우 딸에게도 전해지지만, 귀족 타이틀은 아들이 없을 경우에 단절된다. 차별에 엄격한 영국 사회에 이러한 남녀차별 제도가 남아 있는 것이 놀랍다.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라서 그런가?

귀족 작위가 상속되는 방식인 male primogeniture에서 male이 빠지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첫째가 작위를 계승하는 primogeniture가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 법안을 지지하고 있다. 곳곳에 남겨진 차별의 흔적은 오늘날 무장해체 직전이다.

프라이모제니처라는 단어를 처음 봤다. 반대로 막내에게 상속하는 제도도 있다. 이를 말자상속제라고 하며, 영어로는 울티모제니처(Ultimogeniture)다. 장자상속제가 전통적인 상속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사적으로 막내아들에게 상속하는 경우도 많았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장자의 권리’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장자상속제였다고 할 수 있지만, 말자상속제가 아니었는지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이삭, 야곱, 다윗은 모두 막내아들이다.

인류 역사상 두 제도가 경합했지만, 장자상속제가 말자상속제와의 경쟁에서 이겼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말자상속제 아래에서는 장성한 형이 어린 동생을 돌볼 이유가 없다. 종족 번성 차원에서 불리한 제도다. 성경에는 형들이 동생을 죽이거나, 죽이려고 하거나, 팔거나 괴롭혔다. 형인 카인(Cain)은 동생인 아벨(Abel)을 죽였다. 에서(Esau)는 야곱(Jacob)을 죽이려고 했다.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형들은 요셉(Joseph)을 팔아 버렸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야곱은 아들들을 애굽에 보냈는데, 막내아들 벤야민(Benjamin)을 보내지 않았다. 벤야민이 다칠까 걱정해서 그랬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벤야민이 어린아이일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벤야민은 이미 장성한 상태였다. 오히려 형들이 늙은 상태였다. 야곱이 벤야민을 곁에 둔 것은 벤야민이 가계의 상속자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을까? 큰 아들을 전쟁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던 우리 할머니와 같은 마음이었을 수 있다.

유목 사회에서는 자식이 장성하면 분가시키고, 부모는 막내아들과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아버지 사후에 막내아들이 아버지 재산 모두를 승계한다. 몽골의 유목민이 그랬고, 카자흐의 유목민도 그랬다. 카자흐스탄에는 아직도 그런 문화가 남아 있다. 유목은 대규모 단위로 하는 것보다는 소규모 단위로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장성한 아들을 분가시켜, 새로운 일가를 이뤄 번성하도록 유도했다.

현대인을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부른다. 나도 유목민 같은 삶을 산다. 디지털 유목 사회에는 장자상속제보다는 말자상속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재산은 형, 동생, 아들, 딸을 가리지 않고 1/n로 나눈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업, 타이틀과 전가의 보도는 막내에게 상속하는 것이 좋겠다. 현대 사회는 1/n이기도 하고, 형이 동생을 죽일 수도 없기 때문에 말자상속제도의 단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대 사회는 장수하는 사회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은퇴하기에는 은퇴 후 기간이 너무 길다. 그렇다고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곳에서 오래 일해봐야 사이만 안 좋아진다. 큰 아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나가 번성하는 것이 좋겠다. 그 과정에서 현업에 있는 아버지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도 있다. 막내는 아버지 곁에서 사랑받고 있다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으면 된다.

장자가 가업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하면, 물려받을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점은 좋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막내가 가업을 물려받는다고 생각하면, 막내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첫째는 언제나 첫째지만, 막내는 언제나 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막내는 어느 순간이라도 동생이 생길 수 있다. 삼성도 프라이모제니처가 아니고, 울티모제니처가 되었기에 오늘날과 같이 성공한 것일 수도 있다.

영국 의회가 큰 마음을 먹고 귀족 타이틀 상속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면, 단순히 male이라는 단어를 빼는 데에 그치지 말고, 프라이모제니처가 아닌 울티모제니처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나도 디지털 유목 사회의 미래를 생각해서 나의 가업과 타이틀 그리고 전가의 보도를 막내에게 상속해줄 것이다. 아직 이렇다 할 가업과 세습할 수 있는 타이틀과 전가의 보도가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막내아들에게 '울 아들은 왕자죠. 왕자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죠?'라고 말했을 때, 아들이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아빠! 아빠가 왕이 아닌데, 제가 어떻게 왕자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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