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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pr 29. 2021

가격표를 힐끔 보다

London Life

London Life 2.0

– (22) 가격표를 힐끔 보다

   

  

내가 회사를 떠나 독립을 고민할 때, 당시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내가 네 나이라면 중앙아시아에 뼈를 묻어 보겠다’는 말로 응원해 주었다.


어느 선배는 자신의 사업 초창기를 회상하면서 첫째 목표는 ‘마음 놓고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 목표는 다이얼 패드, 스카이프와 카카오톡 덕분에 손쉽게 달성되었다. 다음 목표는 비행기와 호텔비 걱정 없이 마음껏 출장을 다닐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 티켓은 노선, 항공사, 클래스와 발권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맘 놓고 출장을 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는 두번째 목표도 어렵지 않게 달성했다.


나는 사업을 한다면, 성공 여부를 가격을 보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5~2018년에 돈이 잘 벌릴 때, 어느 정도 그 목표에 근접했다고 생각했다. 롯데백화점의 남성복 매장인 TIME에 갔다. 여러 개를 골라 놓고 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나왔다. ‘어머 너무 잘 어울려요. 기장도 하나 손볼 게 없고 핏이 예술이에요.’ 판매원의 립서비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장을 손볼 게 없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고, 옷걸이가 좋다는 것은 주관적 사실이니까, 그걸 100% 립서비스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다.


‘그럼 결제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판매원은 ‘***만원 카드로 결제하겠습니다. 할부로 할까요? 일시불로 할까요?’ 나는 속으로 ‘그게 얼마인지 꼭 말해주었어야 속이 시원했나요? 할부라고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시불요. 쇼핑백은 여기 숙소로 보내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영화 속의 임창정의 대사처럼 ‘와! 좆나 카리스마 있어!’라고 생각했다. 가격표를 보지 않는 쇼핑은 내게 큰 성취감을 주었다.


백화점 일층에서 에르메스, 샤넬, 프라다 매장을 발견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가격표를 보지 않고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래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로 나는 처음부터 타임만 좋았다.


런던에서는 한번도 가격표를 보지 않고 물건을 사는 호기를 부리지 않았다. 돈벌이도 시원찮지만, 아는 브랜드가 한정적이어서 매장에 들어가면서 가격대를 예상하기가 어렵다. 만만하게 보았던 버버리 매장에만 들어가도, 스타일에 압도되어 자연스럽게 먼저 가격표를 돌려 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잘 사지도 않는다. 런던에서도 유니클로, H&M, ZARA에 가면 가격표를 보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물어보지도 않은 가격을 왜 이리도 매문짝만하게 붙여 놓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눈을 감지 않고는 가격을 보지 않을 재간이 없다. 제품은 왜 그렇게 품질이 좋은지? 우리 아이들은 모조리 유니클로다.


나는 투자나 트레이딩 분야에서 오래 일하고 있다. 몇 년 간격으로 장기 투자와 단기 트레이딩 업무를 번갈아 맞고 있는 것 같다. 투자를 할 대상을 찾거나 트레이딩 할 대상을 찾으면서 가격표를 보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투자 자산에도 가격표가 있다. 그 가격은 대체로 상대적인 가치다. 유사 자산과 대상 자산의 가격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대안 자산과 대비하여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둘째 가격표는 해당 자산의 가격을 역사적 기준에서 보는 것이다. 어제, 한 달 전에, 일 년 전에는 얼마였는가? 해당 자산의 현재 가격을 과거 가격과 비교해 본다. 차트를 보는 행위가 이 일에 해당한다.


어떤 이는 첫번째 가격만을 보고 두번째 가격은 보지 않고, 다른 이는 첫번째 가격은 신경 쓰지 않고 두번째 가격인 차트만 뚫어져라 본다. 첫번째 방법론이 더 가오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많은 투자자와 트레이더들이 두 가격을 두루두루 본다. 그렇다면 다른 자산과 가치를 비교하거나 차트를 보지 않고 자산을 매입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타임에서 옷을 사듯이 주식 시장에서 주식을 고르고, 코인 시장에서 코인을 고르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테슬라 차량이 좋아서, 테슬라가 그리는 미래가 좋아서, 엘론 머스크의 선구적 기업가 정신이 좋아서, 테슬라의 가치를 현대자동차의 가치와 비교하지 않고, 테슬라의 주가가 최근에 얼마가 올랐는지를 보지 않고, 주식을 사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TH가 편리해서, ETH가 그리는 미래가 좋아서, 비탈릭 뷰테린의 해체적인 혁신이 좋아서, ETH가격을 비트코인이나 백금 가격과 비교하지 않고, 코로나 이전과 대비하지 않고 매수하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가격을 보지 않고 사는 행위는 비합리적인가? 가격은 보지 않지만, 마음에 드는 무엇가는 있을 것이다. 옷의 모양과 색깔, 자동차의 모양과 기술, ETH가 그리는 미래 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는 행위가 가격 때문이 아니라 물건 그 자체 때문이라는 것은 합리/비합리라는 판단을 떠나 적잖게 가오가 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가격표를 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대놓고 보지 않는 것이지 전혀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타임이 대략 어느 정도 선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가격표를 이미 힐끗 본 셈이기도 하다. 테슬라 주가를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눈을 감고 살지 않는 이상 이래 저래 듣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가격표를 보지 않고 물건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 가격은 그러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영국에 있는 많은 골프 클럽이 그렇다. 모두가 가입을 원하는 명문 클럽의 경우 입회비를 높이면 가입 희망자가 줄어들 것이고, 희망하는 사람은 비싼 돈을 내고 즉시 가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클럽 가입 희망자는 대기를 해야 한다.



스코틀랜드 북쪽에 가면 로열 더녹이라는 골프 클럽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골프 코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코스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해변가에 있는 링크스 코스는 일반적으로 평지여서 한 코스에서 다른 코스를 내려다볼 수가 없다. 로열 더녹은 다르다. 해변과 골프 코스의 경치가 예술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그러나 로열 더녹은 참으로 멀리 있다.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8시간, 에든버러에서 인버네스까지 3시간을 가야 하며, 더녹은 그곳으로부터도 1시간을 더 가야 한다.


그곳 클럽하우스에서 점심을 먹고 2시 10분 티오프를 준비하고 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급하게 오더니 ‘저녁에 바쁜 일정이 있는데, 먼저 쳐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세요. 더 일찍 오지 그러셨어요?’라고 물었더니, ‘11시부터 2시까지는 회원들만 티오프를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회원을 가입하시지 그러세요?’ ‘가입 신청을 했지. 지금 20년째 기다리고 있어!’ ‘그럼 언제 가입이 되세요?’ ‘아마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 같아!’ ‘이 작은 시골 마을의 골프 클럽에 입회하기 위해서 30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헉하고 놀라면서, 하마터면 ‘10년 후에는 골프를 치시기 어려우시잖아요’라고 말할 뻔했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이  가치를 항상 적절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격표를 뚫어지게 보고 판단하는 것이 항상 합리적인 판단은 아니다. 좋다면 사고, 좋다면 기다리고, 좋다면 즐기는 것이지 가격은 부차적일 때도 많다. 그러니 너무 가격표에 연연하지 말자. 오늘 오랜만에 유니클로에 가서 둘러봐야겠다. 아이들을 위한 어떤 신상이 있는지 말이다. 어떤 지인은 아마 에르메스에 가서 그렇게 둘러볼 것이다. 그러나 그나 나나 오늘 똑같이 골프 클럽의 대기자 명단에 있다. 내가   앞이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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