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Jun 23. 2021

버버리와 브렉시트, 그리고 모피로드

London Life

버버리와 브렉시트, 그리고 모피로드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동물애호가라고 자부합니다. 많은 서방 선진국이 모피를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을 아직도 허용하고 있지만, 영국은 이를 일찌감치 금지시켰습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버버리는 모피를 사용한 일체의 의류 제작을 중단했습니다.


그래도 영국에서 모피 옷을  수는 있습니다. 수입을 허용하고 있으니까요. 제작은 안되지만, 수입은 된다? 이중적이? 2007년부터 영국 국민의 93% 모피 옷의 제작  유통에 반대하고 있지만, 영국 정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EU 회원국인 영국은 특정 품목을 EU 뜻에 반해서 독자적으로 수입금지를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영국 동물애호가들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이제 영국은 브렉시트로 인해 특정 품목의 수입을 독자적으로 금지시킬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일종의 take back control인가요? 영국에서 모피 옷 수입이 금지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입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밍크코트를 가지고 있는 분이 딱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은 굿이나 고사 같은 것을 지내 주는 일을 담당했는데, 벌이가 꽤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제 외할아버지의 제사가 구정 바로 전인데, 엄마는 외갓집에 갈 때마다 그 분에게서 밍크코트를 빌렸습니다. 따뜻하기도 따뜻했겠지만, 외할머니에게 딸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었고, 잘 사는 이모들에게 기죽지 않는 역할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밍크코트는 일석삼조였습니다. 그런 분이 동네에 우리 엄마뿐이었겠습니까? 아마 그 밍크코트는 1월 첫째 주는 누가 빌려가고, 둘째 주는 누가 빌려가고, 셋째 주는 누가 빌려가는 스케줄이 있었을 겁니다.


부의 상징 모피옷을 이제는 제작뿐만이 아니라 유통마저 금지시킨다구요? 아내는 3 전에 우연히 루이비통에 갔다가 청자색 밍크 가죽이 앞면에 조금 달려 있는 조끼를 보고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가격은 후덜덜하여 천만 원이 훌쩍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생각도 없으면서 저를  본다고 그걸 사겠다고 했는데, 눈치없는 제가 단호히 사지 말라고 했죠. 아직도 싸울 때면  조끼가 무기로 등장합니다. 영국은 금지시키려면, 진작에 금지시키지 말이죠. 루이비통은 아마 지금도 모피 옷을 제작하고 있을 겁니다.


실친이자 폐친인 윤성학 박사가 [모피로드]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아는 동서의 교역로는 실크로드입니다. 대표적인 실크로드로 천산의 남쪽으로 지나는 천산남로가 있고, 북쪽으로 지나는 천산북로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알마티에 거주하는 작가인 김근향님이 찍은 천산입니다. 윤성학 박사와 저는 천산북로 상의 도시인 알마티와 비슈켁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윤박사는 제게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남진을 막으려는 영국이 벌였던 일련의 전쟁을 다룬 책이었습니다. 그 방대한 책을 한달음에 읽었고, 우연히 저는 러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국에 살고 있습니다. 동서양의 교역로 실크로드의 수평선과 러시아와 영국이 싸우던 중앙아시아 전장을 잇는 수직선이 교차하는 곳에서 우리 인연이 시작되었고, 이 책도 아마 그곳에서 기획되었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유라시아의 전문가임을 자청한 저는 이번에 ‘모피로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습니다. 뭐 이런 전문가가 있나요? 동물 가죽을 찾아 동진했던 러시아, 확보한 모피를 유럽에 팔기 위해 동진했던 길을 따라 교역로가 생겼고, 그게 모피로드라고 합니다.


첫 장부터 이어지는 팩트 폭격이 [그레이트 게임]과 유사합니다. 한달음에 366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그레이트 게임] 완독 후의 느낌을 다시 한번 가지게 됩니다. ‘참 유식해졌다’는 그런 느낌! 길거리 지나가는 누구나 잡고, 모피로드 알아? 이렇게 말을 걸고 싶은 그런 느낌! 아시죠?



이 책이 가지는 단점도 있습니다. 팩트 폭격이 연달아 이어지다보니 그 속에서 길을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포도주를 한 병 들고 각을 잡고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서 교역에 관심이 있다면, 러시아에 관심이 있다면, 한반도 주변 정세의 연원에 관심이 있다면, 각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안되더라도, 길을 헤매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출발은 해 보아야 할 책입니다. 동물애호가라면, 모피 코트의 연원을 탐구하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London Life 2.0 – (37)

(사진 출처, Kunhyang Kim)



작가의 이전글 운전도 못하는데 끼어들기까지 하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