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업
청소는 내 담당인데 오늘따라 와이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 친구 청소에 재능이 있다. 집이 반짝반짝하잖아! 앞으로도 계속했으면 좋겠네. 각종 청소용품을 사서 구석구석 청소하는데, 유대인들의 유월절을 대비한 누룩 제거 대청소가 이렇지 않았을까?
출애굽을 잊지 않기 위해 유대인들은 유월절(부활절과 같은 때)에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빵인 무교병을 먹는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시작하기 전날까지 몇 주에 걸쳐서 누룩을 제거하기 위해 온 집안을 대대적으로 청소한다. 그동안 사용하던 그릇들을 끓는 물에 삶아서 누룩을 제거하기도 하고, 새로운 식기를 사기도 한다. 집안에서 찾은 빵이나 누룩이 들어 있는 식품을 모아서 태우기도 한다. 유대인 마을에 페스트가 돌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대대적인 누룩 제거 습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은 유대인이 페스트를 의도적으로 퍼트렸다며 탄압했다. 전염병이 가져오는 혐오는 이토록 비이성적이다.
집에 데톨이 잔뜩 깔리고, 데톨 냄새가 진동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소독약 때문에 몸이 약해질 것 을 정도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선 가습기 살균제로 죽은 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은 사람 못지않다. 그리고 데톨은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레킷 벤키저(Reckitt Benckiser) 제품이 아닌가?
레킷 벤키저는 시가총액 60조 원, 매출액 25조 원, 영업이익 3조 원에 달하는 영국 회사다. 대표적 제품으로 세정제인 데톨과 콘돔인 듀렉스가 있다. 레킷 벤키저는 2001년에 동양제철화학으로부터 옥시라는 회사를 1600억 원에 인수했다. 옥시는 옥시크린, 옥시 싹싹, 물먹는 하마 등 히트 상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레킷 벤키저는 옥시 브랜드를 포기하지 않고 회사명도 옥시 레킷 벤키저라고 지었고, 경영진도 그대로 유지했다. 우리는 레킷 벤키저 발음이 어려워서 그랬는지 한국 법인을 옥시로, 런던의 레킷 벤키저를 옥시 본사로 불렀다.
2011년에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부각되었고 2016년에 그 문제가 정점에 오르면서 레킷 벤키저는 곤욕을 치렀다. 옥시 제품은 인수 이전 것이었으므로 레킷 벤키저가 책임을 모면하려 했고, 이는 한국 사회에 큰 공분을 일으켰다. 옥시 제품이 레킷 벤키저가 인수하기 전의 제품이라고 해도 가습기 살균제가 문제를 일으킨 시점은 분명히 레킷 벤키저가 옥시를 인수한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한국에서는 옥시 브랜드 가치가 급락했지만, 레킷 벤키저는 전체적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옥시 제품을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데톨과 듀렉스 같은 레킷 벤키저의 제품이 옥시 제품과 동일시되면서 매출이 급감했다. 레킷 벤키저의 안이한 대처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데톨 브랜드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레킷 벤키저뿐 아니라 생활 밀접형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들은 인체 건강과 관련하여 소송에 휘말리곤 한다. 소송에 져서 거액의 손해 배상을 하기도 하면서도 오늘날과 같은 대형 회사로 발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자 아마존에는 손 세정제와 위생 제품의 가격이 분단위로 치솟았고, 고 있고, 시간 단위로 품절 품목이 늘어났다. 그중에도 비싼 제품군을 구성하고 있는 레킷 벤키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의 최대 수혜 기업이 되었다. 데톨의 제품에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99.9% 잡는다고 쓰여 있다. 코로나도 잡는다고 쓰여 있다. 코로나는 우리 몸 밖에 있으면 이처럼 별 것도 아니다.
데톨은 성을 지키는 해자(moat)처럼 우리 집을 감싸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도하다는 것을 알지만, 아내는 수시로 배달되어 오는 데톨 제품을 보며 흐뭇한 표정이다. 비로 해자에 물이 가득 찰 때 성주의 표정이 딱 이랬을까? 아내는 데톨을 사고, 나는 레킷 벤키저 주식을 산다. 이번 투자는 손해를 봐도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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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 쓰고 4월 13일에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