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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l 08. 2021

톨스토이와 책장, 그리고 두 개의 스위치

London Life

톨스토이와 책장, 그리고 두 개의 스위치

   

   

톨스토이가 책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책을 읽고 있었다. 소피아는 이따금씩 곁눈질로 남편을 쳐다보았지만,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가 썼는지 대단한 책이구만!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어!”라고 말하며 방을 나서는 남편을 이상하게 생각한 아내는 책장으로 가서 책을 확인했다. 책 표지에는 Анна Каренина, Лев Толстой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라고 쓰여 있었다. “저 이가 드디어 미쳤군!”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톨스토이 팬이 만들어 낸 구라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에피소드를 듣고 책을 사지 않을 문학 팬은 없었을 것이다. [안나 까레니나]는 150년간 최고의 문학 작품 중의 하나였고, 최고의 영화 소재 중의 하나였다.


[안나 까레니나] 이후에 톨스토이는 변했다. 통속 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으며, 보다 교육적이고 종교적인 글을 썼다. 안나 까레니나 이후의 톨스토이는 그 이전의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었다. 늙으막히 옛글을 읽었을 때 자신의 글이라는 인식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걸 정신분열이나 이중인격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톨스토이의 머리에 두 개의 회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어떨까?

  

  

얼마 전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축구 경기가 있었다. 축구 팬들이 어깨에 국기를 두르고 대낮부터 시내를 활보했다. 건장한 축구 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다가오자, 마주 오던 어느 여성이 망설이더니 그들을 피해서 돌아갔다. 이 젊은이들은 평상 시라면 지하철과 거리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여성을 기꺼이 도와줄 것이고, 흔쾌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편에 설 것이다. 소매치기가 발생하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범인을 제압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영국] 책 표지에는 ‘신사와 훌리건이 공존하는 나라’라는 말이 희미하게 쓰여있다. 영국에 신사가 따로 있고, 훌리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영국 신사가 축구 유니폼을 입으면 훌리건이 된다. 유니폼을 입은 축구팬은 시내 한복판에서 축구공을 함부로 찼다. 축구공은 지나가는 차에 맞기도 했고, 보행자에게 위협이 되기도 했다. 이들에게도 평상시 모드가 있고, 축구팬 모드가 있는 것인가? 스위치 변경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열성 축구팬이 되기 어려운가?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트븐슨(Robert Stevenson)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관한 이상한 사건]은 극단적인 예시다. 스위치를 이쪽으로 돌리면 뜨거운 바람이 불고 저쪽으로 돌리면 차가운 바람이 부는 헤어 드라이기처럼 말이다. 스위치가 항상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처럼 덜 종교적인 모드와 완전 종교적인 모드가 있을 수도 있으며, 막내아들처럼 엄마를 좋아하는 모드와 아빠를 좋아하는 모드가 있을 수도 있다.


어제는 골프를 치고 샤워를 했다. 클럽하우스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페이스북을 보고 있는데, 내가 최근에 썼던 글과 댓글이 낯설게 느껴졌다. 누군가 내 계정을 해킹하여 이상한 글을 남긴 것처럼 보였다. 톨스토이처럼 스스로 감탄할 수준이 전혀 아니었고, 마치 AI가 랜덤하게 구성한 글 같고 비현실적이었다. 이 증상은 곧 사라졌지만, 나는 걱정되었다. 원인은 무엇인가?



책이 나온 후에 와이프로부터 ‘착해졌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일상의 말투도, 페이스북의 댓글도, 단체 카톡방의 말투도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단다. 이것은 책을 팔기 위해 무의식 중에 발동한 겸손 모드였을 수도 있다. 샤워를 하면서 뇌가 예전 모드로 전환되었고, 예전 모드로 글을 보니 겸손 모드로 쓴 글이 내 것이 아니라고 느껴진 것이다.


최근에 책을 낸 페친과 브런치 친구 중에 유사한 경험이 있는지, 의사 지인 중에 유사한 임상사례를 가지신 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보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계속 써야 할 것 같다. 더 선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책장 한가득 책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책장 한 가득이라고? 톨스토이가 기대어 책을 읽었던 책장은 어떠한 형태였을지도 궁금하다.


London Life 2.0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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